원내 주요 정당들이 제1야당인 한국당을 이른바 '패싱'하는 이런 흐름은 조만간 선거제 개편안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처리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전략 실패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책임론의 칼끝이 원내지도부를 넘어 황교안 대표로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실 협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9일 새로 원내사령탑을 맡은 심재철 원내대표와 김재원 정책위의장은 곧바로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 여야 3당 교섭단체 회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전임 원내지도부가 협의하던 얼개를 이어받아 △예산안 논의 참여 △예산안 10일 처리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철회 등을 골자로 하는 임시 합의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곧바로 내부 구성원 반발에 직면했다. 필리버스터 철회에 대한 소속 의원들의 반감이 거세게 제기되면서 합의안은 의원총회 추인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다음 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예산안 처리에 한국당 참여를 포기하는 빌미가 됐다. 감액 범위에 대한 이견의 간극을 좁혔음에도 한국당 '시간끌기' 전략에 대응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게 민주당 입장이다.
뒤늦게 본회의장에 진입한 한국당 의원들은 여당이 '4+1'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바른미래당 일부, 정의당, 민주평화당, 그리고 대안신당과 연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문 의장이 아들 공천을 위해 무리하게 예산안을 상정했다"며 고함칠 뿐이었다.
한국당이 이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배경으로는 당내에 강경파가 득세했다는 점, 그리고 황 대표의 과격한 리더십이 거론된다. 당장 신임 원내지도부가 운영의 묘를 살려보려 해도 당내 역학구도 상 '무조건 반대'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9일 의원총회에 참여했던 한 수도권 의원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이런 분위기에서 협상하자는 온건파는 낄 수가 없다"며 "한 명이 협상을 얘기하더라도 뒤이어 여러 명이 일어나 반발하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고 털어놨다.
다른 중진 의원은 "경선 후보 가운데 가장 강성으로 알려졌던 심 원내대표마저도 추인이 안 됐다. 이거야말로 '탈레반 같은 집단'이 아니겠냐"면서 "황 대표도 이런 방식을 풀어갈 '깜냥'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일갈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 제기되는 원내지도부에 대한 책임론이 당장 크게 번지지는 않는 모양새다. 외려 전임자 교체로 '전쟁 중 장수를 바꾼' 책임을 그보다 윗선, 황 대표 쪽으로 물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럼에도 당장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수 없는 건 이제 '패스트트랙 대전'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여권은 이르면 오는 13일 임시국회에서부터 선거법, 공수처(고위공직자 범죄수사처) 설치법 등 관련 법안 처리를 예고하고 있다. 물론 마지막까지 협상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날 한국당 의원총회에서도 협상 기조로 선회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잖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 비박계 의원은 "투쟁은 협상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지 원래 야당의 무기는 협상이다. 투쟁만 하다가는 숫자에 밀려서 질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비등했다"며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한국당은 투쟁의 수위만 더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황 대표는 또 농성을 시작했다. 단식을 종료한 지 딱 2주만. 이번엔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 앞이다. 예산안 패싱을 주말로 계획 중인 장외집회의 동력으로 삼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물론 당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당 관계자는 "보나마나 망할 것"이라며 "한 가지 메시지에 집중해도 여론이 반응하기 쉽지 않은데 집회에서 예산안, 패스트트랙, 여기에 친문게이트까지 얘기하려면 불이 붙을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