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생(生)의 기억조차 말살…제주 4·3 수장 학살의 비극 ② "손발 철사로 묶여…" 대마도로 흘러간 제주 4·3 희생자 ③ '시신 태우는 곳', 대마도에 남은 4·3 수장 희생자 흔적 ④ 4·3 수장 시신 흘러간 대마도, 지금은 제주 쓰레기가… ⑤ 대마도에 떠오른 시신, "밀항한 제주인과 닮아" ⑥ 바다에 버려진 제주 4·3, 대마도가 품다 ⑦ 어둠 속 '제주 4·3 수장 학살'…일본인이 세운 위령탑만 (끝) |
◇ "왜 죽였나?" 지금껏 4·3 수장 학살 진상규명 없어
송승문(70)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이 2일 제주CBS 취재진에게 한 말이다. 4‧3 수장 학살이 벌어진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태껏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4‧3 수장 희생자와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군‧경이 초토화 작전을 벌이던 1948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 사이 제주 전역에서 수장이 이뤄지거나,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 된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500여 명이 제주항 앞바다에서 수장된 사실만 전해진다.
아울러 정식재판 없이 불법적으로 수장이 이뤄졌기 때문에 관련 기록도 현재로선 드러난 게 없다. 군‧경이 무더기 학살로 나중에 후환이 있을까 봐 청소하듯 시신의 흔적까지 없앤 것이다. 이때문에 수장 학살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수장 학살 기록을 찾아내고, 살아 있는 목격자 증언을 확보해 수장 학살의 진상을 드러낼 의무가 있었다. 지난 2000년 '제주 4ㆍ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까지 했기 때문이다.
무고한 양민이 공권력에 의해 대규모로 잔인하게 수장된 사건은 7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바닷속에 버려져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추가 진상조사 내용 등이 담긴 '4‧3 특별법 개정안'은 2017년 12월 더불어민주당 오영훈(제주시 을)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한 후 2년 가까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여‧야의 극심한 대립 속에 4‧3특별법 개정안은 처리되지 않고 있다. 지금으로선 연내 처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은 "피해자 유가족의 연세가 많은 상황이어서 하루빨리 수장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지만, 정쟁으로 추가 진상조사 내용이 담긴 4‧3특별법 개정안 처리가 늦어지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출했다.
◇ "일본인이 세운 위령탑서 제를…우리 손으로 세워야"
제주CBS 취재진이 지난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일본 대마도 현지에서 확인한 희생자 위령탑은 대마도 서쪽 오우미 마을의 '대마도해협 조난자 추도비', 북서쪽 사고만에 에토 유키하루(62)씨가 세운 '공양탑' 등이다.
특히 에토 씨는 70년 전 한국인 시신 수백 구를 수습해 장례를 치러준 아버지 故 에토 히카루(2007년 81세로 사망)씨의 뜻을 받들어 희생자를 위한 공양탑을 자비 250만 엔(한화 2600만 원)을 들여 세웠다.
이처럼 우리 손으로 세운 위령탑이 없다 보니 4‧3 수장 학살 희생자 유가족은 현재 일본인이 세운 위령탑 앞에서 희생자를 추도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 현재까지 4‧3 유가족이 대마도를 3차례 찾았지만, 그때마다 위령제를 연 곳은 모두 일본인이 세운 위령탑 앞에서였다.
홍성효(72) 제주 북부예비검속 희생자유족회 회장은 지난 9월 29일 에토 씨가 세운 공양탑이 있는 대마도 사고만에서 열린 희생자 위령제에서 취재진을 만나 '우리 손으로 세운 위령탑이 없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다른 나라 사람이 세운 위령탑에서 제를 지내는 상황이 유가족으로서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위령탑을 반드시 대마도에 세워야 하는데, 한‧일 양국 간 이해관계가 없으면 안 되고, 부지 등 예산도 들어가는 문제라 정부나 제주도가 나서줬으면 좋겠다."
4‧3 당시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제주 바다에 버려지고 일본 대마도까지 흘러간 희생자들. 정부와 제주도의 무관심 속에 유가족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