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생(生)의 기억조차 말살…제주 4·3 수장 학살의 비극 ② "손발 철사로 묶여…" 대마도로 흘러간 제주 4·3 희생자 ③ '시신 태우는 곳', 대마도에 남은 4·3 수장 희생자 흔적 ④ 4·3 수장 시신 흘러간 대마도, 지금은 제주 쓰레기가… ⑤ 대마도에 떠오른 시신…"밀항한 제주인과 닮아" (계속) |
◇ "시신 수십 구 흘러와…대마도서 숯 굽는 제주인 닮아"
지난 10월 16일 오후 취재진이 하대마도의 조그마한 어촌 마을인 마가리 마을에서 만난 어부 모리야마 요시히코(72)씨가 한 증언이다. '1950년 전후로 한국인 시신이 떠밀려왔는지' 묻자 옛 화장터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70여 년 전 한국인 시신 수십 구가 떠밀려왔을 때 마을 사람이 시신을 화장했던 모래사장은 현재 매립돼 아스팔트 도로가 나 있다. 과거 이곳이 해안가였음을 알려주는 것은 도로 초입에 어색하게 서 있는 해안 침식 암석뿐이다.
특히 모리야마 씨는 70여 년 전 해안가로 떠밀려온 시신이 한국인 시신임을 재차 강조했다. 4·3 광풍을 피해 대마도로 밀항해온 제주도민의 모습과 유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도민들은 대마도 산 속에서 움막을 지어 숯을 내다 팔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일본사람이면 신분을 알았을 테지만, 대부분 확인하지 못해서 화장했어요. 마가리 마을이 제주도 해녀들의 기지이기도 하고 제주도와 교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시신 모습을 보니 숯을 굽는 제주도 사람과 비슷하기도 해서 제주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마가리 마을에서 나고 자란 우메노 마사히로(57)씨는 매장지를 가리키며 "모래사장으로 떠밀려온 시신은 그때그때 화장했지만, 그 시신 중 일부는 이곳에 매장했습니다. 사람을 묻은 뒤에는 작은 소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 해안에 떠오른 시신, 거둬주고 절에 유골 안치한 현지인
한‧일 관계가 악화하기 전 한국인들의 필수 관광지였던 '티아라 몰' 인근 태평사에는 한국인 시신 50~60구가 화장돼 유골이 안치됐다. 그 유골은 절 내 <표류자지령위>와 <무연지제령> 비석 아래 묻혔다.
특히 미야가와 주지는 70여 년 전 집중적으로 한국인 시신이 떠밀려 왔다고 강조했다. 그 당시는 군‧경이 도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수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표류 시신이 떠내려오는 경우는 드문데 한때 갑자기 많은 시신이 떠밀려 왔어요. 시신은 경찰을 통해서 이곳으로 모셔졌습니다."
태평사에서 이즈하라 해안 쪽으로 500m 떨어진 서산사에는 한국인 시신 5구~10구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지는 절 묘지 뒤편 대나무 숲이다. 서산사는 이즈하라 내에서도 시신이 떠밀려온 해안가와 가장 가까운 절이기도 하다.
한국인 시신으로 추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옷차림도 한국인과 비슷했지만, 대마도 사람이었다면 금방 알아봤을 겁니다. 일본 본토 사람이라면 대마도 주변 해류 흐름상 이쪽이 아닌 야마구치현 등 일본 본토로 흘러갔을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다나카 전 주지는 매장지 위치를 현재에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대마도에 태풍이 자주 오면서 산사태 등으로 지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매장지 위치를 정확하게 알았지만, 산사태가 잦아 지금은 시신이 유출됐는지 그대로 묻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이날 취재진이 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을 갔을 때는 일본을 강타한 제19호 태풍 '하기비스'의 영향으로 매장지 곳곳이 패여 있었다. 태풍으로 쓰러진 고목만이 흐릿해져 가는 70여 년 전 기억을 간신히 붙들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