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생(生)의 기억조차 말살…제주 4·3 수장 학살의 비극 ② "손발 철사로 묶여…" 대마도로 흘러간 제주 4·3 희생자 ③ '시신 태우는 곳' 대마도에 남은 4·3 수장 희생자 흔적 (계속) |
◇ 4·3 당시 떠밀려온 한국인 시신…주민이 화장
지난 10월 15일 오후 취재진이 사고만 해안가에서 우연히 만난 인근 미나토 마을 주민 우찌하마 수구레(78)씨가 이렇게 말했다. '1950년 전후로 한국인 시신이 많이 떠밀려온 사실을 아느냐'고 묻자 취재진을 이곳으로 안내하며 한 말이다.
'히토야케바'는 맑은 날에 부산 시내를 훤히 볼 수 있는 '이국이 보이는 언덕 전망대'에서 해안가를 따라 미나토 마을 방면으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갈대로 둘러싸인 해안가 공터에는 파도에 떠밀려온 페트병, 어구 등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쓰레기 중에는 삼다수 페트병도 눈에 띄었다.
"보시다시피 이곳에 한국어가 적힌 쓰레기가 많이 떠밀려오는데, 1950년 전후로 한국인 시신이 이곳에 많이 흘러와서 수십 구를 화장했어요. 일본 다른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시체가 떠밀려온다고 생각하긴 어렵거든요."
"지금은 아버지께서 치매에 걸리셨지만, 어렸을 때 그곳에서 한국인 시신을 많이 화장했다고 들었습니다."
미나토 마을에서 나고 자란 다니나가(82)씨도 '히토야케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해안에 한국인 시신이 떠밀려오면 묻을 곳이 없어서 히토야케바에서 시신을 화장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1950년 전후로 히토야케바 인근 해안가로 떠밀려온 한국인 시신 4구는 바로 옆 사리에 마을 주민들이 마을 공터에 무덤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취재진이 처음으로 직접 현장을 확인한 결과 지금은 주변에 아스팔트 도로가 닦이고, 대나무 숲이 들어서 있었다.
◇ "옷에 한국어 적힌 시신이…너무 많아 매장"
1950년 전후 이곳으로 100구~200구의 한국인 시신이 떠밀려오자 미나토 마을에 거주하던 故 에토 히카루(2007년 81세 나이로 사망)씨가 친구 5명과 함께 시신을 매장한 곳이다. 그의 아들 에토 유키하루(62)씨는 아버지가 숨진 직후 인근 해안에 한국인 시신을 위해 250만 엔(한화 2600만 원)을 들여 '공양탑'을 세웠다.
"아버지께서 20대였을 때 몇 개월 사이에 이곳에 수많은 시신이 떠밀려왔다고 합니다. 남녀 구분 없이 시신이 왔고, 옷이나 옷에 지니고 있던 물품에 한국어가 적혀 있어서 한국인 시신으로 생각했다고 하셨습니다."
4‧3 당시 총살되거나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사람 중에 가족들이 시신을 찾을 수 있게 희생자가 군‧경에 끌려가기 전 자신의 이름을 새긴 도장이나 물품을 지니는 경우가 많았다. 또 군‧경은 남녀 가리지 않고 학살을 자행했다. 사고만 해안에 떠밀려온 시신이 4‧3 수장 희생자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처음엔 20구~30구의 시신만 오니깐 시신을 모닥불 태우듯이 교차시켜 해안에 화장했다고 하셨어요. 나중엔 너무 많은 시신이 떠내려와서 당시 흙이 많았던 이곳에서 집단 매장하셨다고 합니다. 시신 상태도 좋지 않아 다른 곳으로 운반할 수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제주 4‧3 당시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차가운 바다에 버려진 수장 학살 희생자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서일까. 에토 씨의 설명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들은 이곳 파도 소리는 유달리 구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