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설정한 연말 비핵화 협상 시한이 하릴없이 소진되면서 ‘노딜’ 우려가 높아가는 가운데 작으나마 대화 재개의 여지가 생겨난 것이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13일(현지시간) 북핵 제거를 위한 외교적 협상 증진에 도움이 된다면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조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고 AP통신과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이는 북한이 전날 저녁 국무위원회 대변인 명의로 한미 연합공중훈련 재개 방침을 비난하며 “경솔한 행동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경고한 지 반나절만의 일이다.
앞서 미국 국방부는 지난 7일, 지난해 중단했던 한미 연합공중훈련을 규모는 줄이되 예정대로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엿새 만에 입장을 바꿔가며 기민하게 대응하는 것은 북한의 이번 담화가 내용과 형식면에서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김정은 위원장이 주재하는 국무위원회 명의로 담화를 낸 것은 처음이다. 이번에는 대변인 담화였지만 다음번엔 김 위원장 명의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김 위원장은 북미 간 충돌 위기가 높아지던 2017년 9월 21일 성명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미치광이’ ‘겁먹은 개’ ‘늙다리’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바 있다.
북한은 또 이번 담화에서 트럼프라는 이름은 뺐지만 한동안 자제했던 ‘미국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재개함으로써 공격 강도를 높였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김정은 위원장이 있는 국무위원회 이름으로까지 담화를 발표한 것은 이후 군사행동, 즉 국제사회가 크게 반발할 신형 잠수함에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 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 축적 차원”으로 분석했다.
어찌됐든 에스퍼 장관의 발언은 일단 북한에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지난 6일 권정근 외무성 순회대사 담화에 이어 7일 만에 재차 경고에 나서는 등 한미 군사훈련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전문가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대화 진전을 믿고 경제건설총력노선으로 전환했음에도 미국이 대북제재는 물론 군사 압박까지 강화하는 것에 대내적으로 체면을 구긴 상태라고 분석하고 있다.
북핵 협상 재개를 위해서는 최소한 한미군사훈련 잠정 중단 정도의 ‘선의 표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는 최근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한미군사훈련을 완전 중단하면 북한은 즉각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전날 이례적으로 국무위원회 담화를 발표한 것은 14~15일 서울에서 열리는 한미안보협의회의(SCM) 등을 겨냥한 측면이 크다.
한미는 이번 협의에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과 방위비 분담금 외에 연합군사훈련 실시 문제 등을 사실상 최종 조율할 것으로 알려졌다.
조철수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은 최근 “기회의 창이 매일 닫히고 있다”며 연말 협상시한이 임박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와 함께 초조함을 함께 드러냈다.
북한은 만약 한미안보협의 결과 군사훈련 유예 등의 결정이 내려진다면 즉각 비핵화 협상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번 한미안보협의는 연합군사훈련 문제 외에 지소미아와 방위비 등의 난제가 함께 얽혀있어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
미국은 이미 지소미아와 방위비 문제를 사실상 연계하는 협상전략으로 우리 측을 압박하고 있다. 여기에 군사훈련까지 결부시킬 경우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우리 입장이 더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태다.
이와 관련, 에스퍼 장관은 군사훈련 조정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도 “우리는 외교적 필요성에 따라 훈련 태세를 더 많거나 더 적게 조정할 것”이라며 방향성은 단정 짓지 않았다. 다각도로 협상력을 극대화 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