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김영만 (열린사회 희망연대 상임고문)
조두남을 통해서, 우리 속에 남아있는 친일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열린사회 희망연대 김영만 상임고문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영만> 반갑습니다.
◇김효영> 조두남이라는 음악가, 그리고 가곡 '선구자'를 모르는 국민들은 없을거예요.
◆김영만> 네. 그렇습니다. 제 2의 애국가라고 할 정도로 국가의 행사나 지방자치단체 행사나 제2의 애국가처럼 불렀던 노래이거든요. 이 노래가 일제강점기 때 만주지역, 용정을 배경으로 해서 나왔던 노래인데. 조두남 씨가 선구자라는 노래를 가지고 인터뷰를 통해서거나 자서전을 통해서 어떻게 말을 했냐면 '자기가 젊은 시절에 1932년도에 하얼빈 해란강 강가에 아주 싸구려 하숙집에 있었는데, 어느날 아주 젊은 사람이 찾아와서 호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종이 한 장을 내놨는데 그게 바로 선구자의 가사였다. 그 사람이 내놓을 때는 용정의 노래라는 제목이었는데, 자기 이름을 윤혜영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사에 곡을 붙여주시면 보름쯤 뒤에 찾으러 오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내가 생각했을 때는 이 사람은 틀림없이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을 당한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효영> 사실이라면 매우 감동적입니다.
◆김영만> 예. 이렇게 감동적인 작곡 배경이 국민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선구자라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독립운동가의 노래라고 이야기를 했고. 늘 부를때마다 콧잔등이 찡한 그런 노래였습니다.
◇김효영> 그런데.
◆김영만> 그런데 알고보니 그 노래를 작사한 윤혜영은 유명한 친일 시인이었던 겁니다. 우리나라의 학자도 면밀히 조사를 해서 논문으로 발표도 했고 또 중국에서도 이야기를 했고 윤혜영은 친일 작가이다. 그것도 아주 유명했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윤혜영이 독립운동가가 아니고 친일시인이었다는 겁니다.
◇김효영> 조두남과 윤혜영의 관계는요?
◆김영만> 조사결과 조두남은 윤혜영과 해방될 때까지 아주 절친하게 지냈던 사이이고, 자주 만나서 악극단도 같이 다니고, 술도 자주 마셨던 사람이었고, 본인도 친일 작곡을 여러 곡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김효영> 거짓말 한 것이었네요.
◆김영만> 네. 조두남도 친일을 한 사람으로 밝혀졌고, 그 뒤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간 것입니다.
◇김효영> 그럼 '선구자'라는 노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가사를 보면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김영만> 여기서 선구자를 우리는 독립운동가로 생각하고 있지요?
◇김효영> 그러니까요.
◆김영만> 아닙니다. 선구자라는 단어 자체는 이 나라에는 없었고요. 아예 없었습니다. 선구자는 독립군을 때려잡는 완전히 독립군하고 반대되는 단어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만주에 있는 조선독립군을 때려잡으러 다녔던 간도특설대.
◇김효영> 간도특설대.
◆김영만> 간도 특설대 군가에 자기 자신들을 선구자라고 지칭을 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간도 특설대 군가를 선생님께서 가지고 오셨는데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해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큰 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앉고 우리는 나섰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김영만> 선구자의 사명이 독립군 때려잡는 것이었으니까요.
◇김효영> 우리나라엔 없었던 단어.
독립운동가 토벌조직인 간도특설대의 군가. 간도 특설대 대원들을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 '선구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김영만> 선구자는 노래 제목 자체가 일본식 단어였던 겁니다.
◇김효영> 그런데 우리 국민들이 애국가처럼 불렀던 것입니다.
◆김영만>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었으면 그런 단어들을 우리가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철거했던 조두남 기념물들이 다시 전시됐을까요?
◆김영만> 15년 전에 철거했는데, 15년만에 완전히 친일이 다시 복원이 되어버렸더라고요. 친일의 역사는 참 무섭습니다.
◇김효영> 그러니까, 누가 왜 그랬을까요?
◆김영만> 여기를 운영하는 운영위원들이 있습니다. 음악 전문가를 비롯해서 각계인사들이 10명정도로 운영위원들이 있더라고요.
◇김효영> 혹시 그 사람들 중에 조두남의 제자나 후배,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김영만> 당연히 있지요. 저희들이 명단 공개하라 해서 받아본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들과 완전히 반대입장에 있어서 엄청나게 많이 싸웠고 지금도 조두남 친일이 이렇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가있더라고요.
◇김효영> 그 사람들이 위원입니까?
◆김영만> 네 위원으로 들어가있더라고요. 몇 명이 그렇더라고요.
◇김효영> 그 위원을 선정하는 것은 창원시일 것아닙니까? 위촉하는 것은?
◆김영만> 사실을 잘 모르는 공무원들이 있는데, 인터넷에 치면 바로 다 나오거든요.
우리 속에 친일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친일은 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음악, 좋은 음악을 만들었는데 친일했다고 하느냐?
◇김효영> 그러니까 예술작품과 그의 삶은 구분해서 봐야한다는 입장.
◆김영만> 저도 동의합니다. 거기에 동의를 합니다. 예술 작품과 그 사람의 행적은 당연히 어떤 음악적 공, 어떤 문학적 공, 과학적 공 인정하고 달리 봐야지요. 문제는 기념관이라는 전제가 안 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김효영> 국민들의 세금으로 만든 공적기관이니까.
◆김영만> 네. 그게 전제가 안 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김효영> 개인적으로 좋아하든지 숭배하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
◆김영만>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이원수든 조두남이든 누구든 참 예술적 공은 참 큰데 그런 사람들이 공이 있으면 기념관이라도 지어줘야하는데 그사람이 친일을 했다 그래서 못해줬다. 이렇게 되야 그게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기미 독립 운동에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나옵니다.
◇김효영> 맞아요.
◆김영만> 그러면 대한민국에서 친일을 안 따지면 무엇을 따지겠습니까?다른 것은 안 묻겠다는 겁니다. 딱 하나. 딱 하나, 친일 또는 친독재, 이 두 개는 물어야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해당이 되면 아무리 위대한 공헌이 있다가도 안타깝지만 개인 기념관은 지어줄 수가 없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김영만> 그렇게 돼야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다는 것이지요.
◇김효영> 시간이 벌써 다되었는데요. 조금전에 이원수를 언급을 하셨습니다.
◆김영만> 이원수 선생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있습니다.
올라가있고 작품이 몇 개 되지 않지만 그 내용은 매우 심각합니다.
◇김효영> 매우 심각하다.
◆김영만>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조국의 해방이니 뭐니 아예 염두에 없고 완전히 일본사람보다 더 철저하게 일본 사람 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 자료들이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간 것이지요.
◇김효영> 알겠습니다. 저희도 다른 건 몰라도 친일인사들은 저희들도 계속해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이원수는 따로 다뤄보겠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 있습니까?
◆김영만> 이번에 아베로 인해서 촉발된 경제전쟁이라고 이야기 하지요.
◇김효영> 네.
◆김영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우리 속에 친일청산을 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의 큰 원인일 수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아베가 우습게 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김효영> 반민특위 때문에 국론이 분열됐다고 말하는 정치인도 있으니까요.
◆김영만> 우리 속의 친일, 그게 적보다 더 무서운 것 같습니다.
◇김효영> 더 무섭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이원수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저희도 친일인사에 대한 인터뷰 계속해서 기록해 나가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영만> 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