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해제 대형사고 부를라'…화관법·화평법 완화 신중론

화관법·화평법 제정 원인은 기업의 반복된 누출사고 때문
규제해제가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 '사회적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 대두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 환경보건시민단체 등이 대학로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내 교육관에서 총회를 열고 가습기 살균제 제조, 판매사의 처벌과 정부의 공개 사과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6.4.24 (자료사진=윤창원 기자)
#2011년 4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중증폐렴 증상을 보이는 임산부와 영유아가 잇따라 입원하고 있다는 신고가 보건당국에 접수됐다. 이들은 심한 기침과 호흡곤란, 기도손상은 물론 폐가 푸석푸석하게 변하는 폐섬유화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보건당국이 역학조사에 들어갔고 1년여가 지난 2012년 2월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1994년부터 시중에 팔리기 시작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지난해 12월까지 무려 1375명이 사망하고 6200여명이 피해를 입었다. 사전검증이나 안전규제를 소홀히 한 채 화학물질을 만들어 팔 경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되는 ‘사회적 참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교훈에 따라 ‘화학물질등록및평가법(화평법)’이 올해 1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생화학 테러 대비 통합훈련 (자료사진=노컷뉴스DB)
#2012년 9월 경북 구미공단의 한 중소기업에서 불산가스가 누출돼 노동자 5명이 숨지고 인근 주민 1만여명이 대피하고 인근 기업들이 조업중단에 들어갔다. 피해액은 360여억원에 달했고, 이는 고스란히 국민세금으로 보전됐다.


기업들의 불산 누출 사고는 당시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특히 충남 금산 지역에서는 한 기업이 4차례에 걸쳐 불산과 질산 누출사고를 일으켜 2014년 국정감사에 대표이사가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유해화학물질 누출사고가 잇따르자 관련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 속에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이 지난 2015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대책으로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가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재계를 중심으로 화학물질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10일 문재인 대통령과 30대 기업 총수들과의 간담회에서 기업인들은 화관법과 화평법 때문에 자유로운 기업활동이 방해를 받고 있다며 ‘규제해제’를 요구했다.

중소기업들도 이들 법의 완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최근 화학물질 취급 중소기업 50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비용부담이 발생한다’ ‘물리적으로 이행불가능한 기준’이라는 이유 등으로 기준을 완화해줄 것을 요구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화관법 등을 제정할 때부터 중소기업에 한해 기준을 낮춰줄 것을 요구해왔다”며 “현재의 기준을 대폭 낮춰 (혜택) 적용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출사고 이후 유해화학물질 생산을 중단했던 일부 기업들도 일본의 수출규제를 틈타 취급 재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불산 누출사고를 반복적으로 일으켰던 중소기업은 지난 2016년 누출 사고 이후 불산 제조를 중단해 왔으나 지난달 말 불산 판매 허가를 추가로 받아 취급 재개에 나섰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이번 허가는 기존에 갖고 있던 불산 제조 허가에 더해 보관 판매까지 할 수 있는 종합허가”라며 “제조와 관련한 시설 점검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 여당도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비상 상황’을 맞아 화관법과 화평법 개정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불산 가스 누출사고
하지만 이같은 퇴행적 움직임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화학물질 관련 주무부서인 환경부는 재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규제 걸림돌론’이 과장됐다며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화관법 및 화평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대 수억원이 소요되며 우리나라의 화학물질 규제가 유럽보다 엄격해 일본산 소재부품을 대체할 국산화가 지장을 받고 있다’는 재계의 주장에 대해 환경부는 “평균 비용이 1,200만원 정도로 조사됐고 유럽의 경우 최대 60가지의 시험서류를 제출해야 하나 우리는 47개에 그치고 있다”며 “또한 일부 조항은 2030년까지 유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관법,화평법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중소기업계의 주장도 허점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소기업계가 기준 완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막상 화관법 등의 규정에 대해서는 27.2%가 ‘모르고 있다’고 응답했고, 물리적으로 관련 기준을 충족할 수 없을 경우 대안 적용이 가능한데도 60.9%가 이같은 내용을 몰라 제도를 활용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화관법과 화평법의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중소기업이 이를 규제로 규정해 ‘해제’부터 주장하는 셈이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영업허가 조건 중 이행하기 어려웠던 가장 큰 부분으로 ‘장외영향평가서,위해관리계획서 제출’을 꼽았다. 화관법, 화평법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행하는 것보다 서류작성을 더 어렵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화학기업으로 구성된 ‘한국화학물질관리협회’ 관계자는 “지난 2015년부터 적용된 화관법이 최근에는 규모가 영세한 기업까지 적용되기 시작했는데, 과거부터 적용받던 기업보다 공정이 작고 생산라인이 단순한데도 서류작성을 더 어렵게 느낀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도금 등 화학물질 단순 사용 업체의 경우 체계적인 학습보다는 예전부터 해오던 경험에 의존을 많이 하다 보니 서류 작성에 애를 먹는다”며 “산(酸)의 농도를 맞출 때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는 방식으로 농도를 맞췄다고 얘기하는 중소기업이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중소기업은 여유인력도 없어 관련 법안과 정책을 숙지하기 쉽지 않다”며 “정부가 교육기회도 제공한다고 하지만 교육을 위해 인력을 빼내기도 쉽지 않다”고 주장했다.

화관법,화평법 규제 해제 움직임에 대해 시민단체인 ‘화학물질감시네트워크’ 현재승 사무국장은 “화관법,화평법이 만들어진 것은 누출사고가 계속 났기 때문이었다”며 기업의 책임론을 거론했다.

이어 “화학물질 누출사고를 내도 벌금이 얼마 안되다 보니 기업들이 사전 개선조치를 게을리하다 사고가 이어졌다”며 화관법,화평법 규제완화가 오히려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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