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수출규제 풀려도 소재부품 국산화 지속돼야"

과거 국제분업체제 무너지고 자국내 생산 확대되는 추세
요동치는 동북아 정세 속 日 아닌 누구라도 무역 보복 가능성 상존

(사진=연합뉴스)

"대기업들이 국내 중소기업들의 불화수소를 안써서 고급제품의 국산화가 더딘 것 아니냐"(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장관)

"누구나 다 만들 수 있지만 문제는 품질이다. 국산은 아직..."(SK그룹 최태원 회장)

최근 한국에 대한 일본 수출규제의 대안으로 부품소재의 국산화가 강조되고 있는 가운데 대기업의 역할론이 논쟁거리로 부상했다.

국내 중소기업들이 부품 소재를 국산화하더라도 대기업이 외면하면 결국 사장되기 때문에 대기업이 국산 제품을 적극 구매해야 한다는게 박 장관의 '원칙론적' 논리이다. 반면 최 회장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품질 낮은 국산을 쓸 수 없지 않느냐는 '현실론'을 내비치고 있다.


'박-최 논쟁'을 바라보고 있는 중소기업은 대체로 박 장관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대기업이 대량구매는 아니더라도 중소기업 제품을 테스트 해보는 기회만이라도 주었으면 하는 하소연을 하고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품목 중 하나를 생산하고 있는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삼성전자나 하이닉스가 우리 제품을 테스트 할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물론 업계 특성상 진입장벽이 높은 것은 이해하지만 어렵게 국산화한 제품을 테스트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거듭 밝혔다.

박-최 논쟁의 소재였던 초고순도 불화수소는 현재 일본 제품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이 초고순도 불화수소 정제에 성공해 지난 2011년 특허까지 받아 국내 중견 기업에 시스템을 납품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해당 업체 관계자는 "현재 우리 회사는 불산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업계에서는 대기업 납품 어려움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부 대기업들도 일본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정밀화학 소재를 개발했지만 수요 대기업들의 외면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국산 소재를 생산하고 있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제품을 바꿔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신제품 사용을 꺼린다"며 "일본 제품을 계속 사용해와 문제가 없었다면 후임자도 계속 일본 제품을 쓰려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1990년대 이후 소재 부품 국산화에 대한 정부 정책에서도 수요 대기업의 문제를 반복해서 지적해왔다. 지난 2005년 당시 산업자원부가 발표한 '부품소재산업 발전전략'은 "첨단 부품소재는 국산화에 성공해도 신뢰성 미흡 등으로 수요기업이 구매를 기피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같은 문제를 극복하고자 산자부는 지난 2010년 부품소재 비전을 발표하고 수요연계형 기술개발 등 R&D 전 주기에 걸쳐 수요 대기업의 참여를 확대해 개발과 동시에 납품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하지만 신뢰성 미흡 등을 이유로 중소,중견기업이 국산화에 성공한 소재, 부품을 사용하기 꺼려하는 대기업의 모습은 박-최 논쟁에서 보듯이 여전하다.

한 중소기업 관련 협회 관계자는 "한 중소기업이 자체 R&D를 통해 새로운 생산라인을 개발해 냈는데, 납품받는 대기업 관계자들이 오면 새로 개발한 최신형 생산라인은 감추고 대신 예전부터 있던 낡은 생산라인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새 생산라인을 통해 원가를 절감하면 대기업이 곧바로 납품단가를 깎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업의 납품횡포→중소기업 연구개발 위축→중소기업 기술력 저하→대기업에 대한 종속 심화→중소기업 자체 기술력 저하의 악순환을 만들게 되고, 이 과정에서 중소,중견기업에게 적합한 소재부품 산업은 발전하기 힘든 구조를 갖게 된다.

전문가들도 소재부품 국산화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수요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일본의 수출규제 때문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소재부품의 국산화와 이를 위한 대기업의 수요 창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조철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은 "최근 글로벌 공급사슬이 자국 내에서 생산을 많이 하는 형태로 변해가고 있다"며 "그래서 각국의 산업정책도 자국의 제조업을 확장하는 정책으로 바뀌고 있다"고 밝혔다. 과거에는 무역을 통한 국제분업 체제를 중시했다면 최근에는 보호무역주의를 바탕으로 자국내 생산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

조 본부장은 "더구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노동이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면서 (임금이 싼 공장 해외 이전 대신) 자국내 생산확대 여지가 커지고 있다"며 "그래서 글로벌 무역이 위축되고 있으며, 이제는 외부 수입을 완전히 단절하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조 본부장은 "더욱 중요한 것은 (이같은 추세 속에서) 특정 국가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신호를 받았기 때문에 국내 기업의 부품 소재 국산화를 가속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해제하더라도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국제 흐름 속에서는 일본 아닌 또다른 나라에 의해 무역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상존하는만큼 이에 대비한 대책을 미리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중간재 및 자본재 의존도는 지난 2000년 26.9%에서 지난해에는 14.6%로 상당히 낮아졌다. 하지만 같은 기간 중국산 중간재와 자본재 비율은 7.3%에서 26.6%로 급등했다. 수치로만 놓고 보면 국산화보다는 중국산이 일본산을 대체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최근 중국과 러시아가 동해상의 카디즈를 침범하며 합동훈련을 하는 등 불안정한 동북아 정세 속에서 중국도 한국을 대상으로 '무역보복' 카드를 꺼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중국도 무역보복에 나선다면 과거의 '마늘'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산업 전반에 걸친 보복이 될 전망이다.

결국 한반도를 둘러싼 불안한 정세와 세계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 경향 속에서 한국도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을 하루 빨리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 본부장은 "수요 대기업 차원에서 단기적으로 비효율이 발생해도 안정적으로 소재와 부품 조달을 위해서는 이를 국산화해야 할 유인이 발생했다"며 "해외 기업들도 일본 기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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