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퇴근길, 한 스파(SPA) 브랜드 매장에 들렀다. 취업 후 처음으로 반바지를 사기 위해서였다. 더 시원해 보이는 린넨바지를 들었다 놨다 하다 결국 면바지로 골랐다. 일종의 자기검열이었다.
이튿날인 지난 18일 아침 출근길, 남색 반바지에 상의는 흰색 반소매 니트를 입었다. 또, 회색 체크무늬 블레이저와 검은색 구두로 '쿨'과 '비즈'에 골고루 무게중심을 뒀다. 묘한 해방감과 '공중도덕을 어기고 있지는 않나' 하는 죄책감이 교차했다. 무릎 뒤 오금을 쓸고 가는 바람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왕 한 김에 취재 목적인 것도 숨기고 뻔뻔하게 나가보자고.
오전 8시 30분. 전북지방경찰청 주변서부터 시선이 느껴졌다. 평소 아는 경찰관을 먼저 발견하고 한참 떨어져 걸었다. 기자실에 들어서자 한 선배 기자는 "너 왜 반바지 입고 다녀?" 하며 웃었다. 그는 살그머니 다가와 기자가 일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오케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
오전 11시, 차장검사와 전주 법조 출입기자단의 티타임에 참석하기 위해 전주지방검찰청을 찾았다.
차장검사실에 후다닥 들어서는 기자를 향해 김관정 차장검사가 "오, 신세대다"하며 운을 띄웠다. 정장 차림의 한 방송기자 선배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반바지 입고 출근한거야?"라고 물었다. 또 다른 선배 기자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가. 어디 반바지를 입고 들어왔어?"라고 했다. 얼굴이 화끈거려 '쿨비즈'라는 말이 무색했다.
함께 있던 기자 중 누군가 "쿨비즈…"라며 말끝을 흐렸지만 대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복장 에티켓인 TPO,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을 알고 있었고, 공식적인 자리에 준했던 만큼 결국 취재 중이라고 실토했다. 집을 나선 지 불과 3시간여 만이었다.
한 신문기자 선배는 "쿨비즈가 가능한 일부 지역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입어도 된대서 입었더니 진짜 입고 나왔냐고 혼났다'는 말도 나오더라"며 위로했다.
오후 2시에는 법정에 들어갔다. 이날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이항로 진안군수의 항소심 재판과, 이른바 '봉침 사건'으로 알려진 복지시설 대표의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회사 복귀 후에도, 취재원과의 술자리에서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눈총들이 온종일 쏟아졌다. 한 시사프로그램 출연자는 기자를 본 뒤 선배 PD에게 '방송국인데 저렇게 입고 출근해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래서야 쿨비즈는 너무 먼나라 이야기였다. 저 멀리 서울시청과 경기도청 등은 오는 7~8월 공무원의 반바지 착용을 허용하기로 했다는데. 이것은 행정경계의 문제인가, 심리적 경계의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