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를 투사로 만든 '영원한 동지'…이희호는 누구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 별세 뒤에도 일주일이 두번씩 묘소 찾아
김 전 대통령에 "중정 무슨 짓 할지 몰라...용감하게 싸워나가 달라" 당부하기도
여성운동의 불모지에서 여성운동 시작…"상급학교 진학 희망자는 나 하나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자료사진. (사진=황진환 기자)

DJ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결을 지켰던 이희호 여사가 우리 정치권에 큰 여운을 남기며 DJ곁으로 떠났다.

이 여사는 민주주의를 일궈 낸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영원한 동지이자, 여성운동의 대모(大母)다.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한 DJ가 초심이 흔들리지 않았던 데에는 이 여사의 역할이 컸다. 그래서 DJ의 정치적 성과의 절반은 이 여사의 몫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남편이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소천한 2009년 8월 이후 매주 두 번씩 김 전 대통령의 묘지를 찾았다고 한다.

화요일에는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과, 금요일에는 혼자 묘소를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곁에는 이 여사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사는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지만,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 여사는 1971년 찬조연설에서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하면 내가 앞장서 타도하겠다"고 외칠 만큼 당찬 여성이었다.

이 여사는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이 일어나기 석달 전인 1973년 5월 편지에서 "중앙정보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면서도 "꾸준히, 용감하게 싸워나가 달라"고 했다.

남편의 안위가 걱정되면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남편과 자신의 진심 앞에 타협하지 않은 모습이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아내에 대한 글에서 이 여사의 이같은 단호함을 '사랑'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늘 아내에게 버림받을까봐, 나 자신의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스개가 아니다. 나의 진심이다.

1980년 당시 내가 정권에 협력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다. 쿠데타에 가담했던 실력자가 나를 찾아와 온갖 회유와 협박을 했다.

나도 인간인데 그런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한순간 흔들리던 나의 마음은 아내를 생각하며 올곧게 바로잡혔다. 아내는 결코 나의 배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내게는 곧 목숨을 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의 사랑을 택했다."

◇ 상급여학교 진학을 희망한 유일한 소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자료사진. (사진=황진환 기자)

"5학년 2학기 때부터 1년 동안 담임선생님이 없었어요. 그러니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죠.

6학년 2학기 때에야 일본인 여성 야마구치 선생님이 새 담임으로 왔어요.

그때 선생님이 '상급 여학교 갈 사람은 손들어보라' 하니까 손든 사람이 나 하나뿐이었어요"

이 여사가 2015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충남 서산에서 초등학교(보통학교)를 나온 이 여사는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여성 운동가의 면모를 갖춰갔다.

이 여사는 이화여고,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교육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시절부터 여성운동에 매진한 이 여사는 대한여자청년단(1950년), 여성문제연구원(1952년) 등을 연이어 창설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램버스 대학교에서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스카릿 대학교 대학원에서 부터 사회학 석사까지 따낸 뒤 이 여사는 국내에서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 강사로도 활동했다.

동시에 여성문제연구원 간사, YWCA(기독교 여자청년회)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직 등을 역임하며 한국 여성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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