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기생충' 자료집 맨 앞장에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을 실었다. 기우(최우식 분)-기정(박소담 분) 남매가 박사장(이선균 분)네 과외 선생으로 들어가게 된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는 최대한 내용을 감춰달라고 취재진에게 부탁한 것이다.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고 나서 기대치가 최고조로 높아진 상황에, 봉 감독의 당부까지 더해지면서 '기생충'은 '어벤져스: 엔드게임'만큼이나 '예상치 못한 스포일러 공격'을 주의해야 하는 영화로 여겨졌다.
미리 밝히자면,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영화에 나오는 특정한 장면에 관한 조여정의 설명이 있기 때문이다. 핵심까진 아니지만, 영화를 아무 정보 없이 즐기고 싶은 독자는 이 기사를 나중에 읽기를 추천한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기생충'의 부잣집 사모님 연교 역 조여정을 만났다. 조여정은 극중 남편 박사장 역 이선균과의 호흡부터, 가장 경험해 보고 싶은 다른 캐릭터가 누구인지,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까지 여러 이야기를 두루 들려주었다.
일문일답 이어서.
▶ 영화에서 보니까 연교가 분량도 적지 않지만 캐릭터 존재감도 상당히 컸다.
그건 모르겠는데 말은 많다. (웃음) 분량 그런 건 조금 다를 수 있는데, 연교는 아줌마니까 말이 많은 거로. (웃음)
▶ 전작 '방자전'이나 '후궁'은 생존을 위해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하위계급 인물의 이야기였다. 그때의 경험이 부자와 빈자를 이야기하는 이번 '기생충' 작업을 하며 도움이 됐는지 궁금하다.
그렇게까지 거창하게는 생각 못한 것 같다. 어렵게 거창하게 '계급' 이런 것보다는, 어떤 상황이건 진짜 있는 사람 같이 하는 게 숙제였다. 연교에 몰두하다 보면 (어떤) 계급에 속해있는지는 생각을 못 하는 거다. 보기에는 부잣집이어도 다른 것을 먹으면서 살지는 않는다. 똑같이 짜파게티를 먹는다. 한우가 들긴 했지만. 남편 챙겨주고 소파에서 낮잠도 자고. 뭐 결국은 똑같다는 거다. 그게 진짜니까. 가장 진짜 같은 모습을 찾아가는 게 항상 관건이었다.
이선균 오빠한테 고마운 게 그런 거다. '이 여자는 이런 여자'라고 제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되더라, 파트너를 보면. 제가 제시카(박소담 분)한테 '열고 싶습니다, 선생님!' 이러면서 울지 않나. 근데 남편 오니까 안 운 척한다. 그게 계산한 게 아니었는데도, 그냥 그 순간에 그렇게 만드는 존재인 거다. 오빠가 이미 박사장인 거다. 그럴 때 파트너한테 진짜 감사하다. 저희 둘이 어디선가 만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처음이더라. (웃음)
▶ 두 사람의 소파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하찮거나 더럽다고 여겼던 사람들이나 행위를, 결정적인 순간에 욕망하는 모습을 보고 속내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쨌건, 이게 결국은 환경이 다른 두 가정, 가족들의 이야기다. (박사장네는) 예의는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다. (저 장면이) 저는 이면이라고까지는 생각 못 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걸 말하는 것뿐이다. 누구를 고의로 부끄럽게 하려고, 수치심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그런 이야기 정도는 하지 않나. 공중화장실에서 없는 줄 알고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런 심리는 어느 정도 있지 않나. 그런 면 중 하나라서 굉장히 현실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연교는 예의는 있지만 운전할 때는 발을 (시트에) 올리고 있는다. 사회적 관습이나 몸에 밴 예의만 차린다고 해서 이게 진정한 예의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연기)했다. 결국은 봉 감독님이 존경스러운 부분 중 하나가 이거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예의, 배려. 그게 이 영화에도 들어가 있더라. 형식적인 예의를 차리는 건 과연 예의인가. 그게 아니란 건 확 느낀단 말이다, 기택이 운전하면서. 그런 화두를 던지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 가장 오랫동안 생각이 나는 장면이나 대사를 꼽는다면.
아까도 좀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연교가) 그냥 말이 많은 아줌마라고만 생각해서… (대사에도) 영화의 클라이맥스나 의미, 주제를 담은 게 아니어서… 어떻게 보면 그냥 떠드는 안주인이라서 그 생각을 못 해 봤다. 거꾸로 묻고 싶다. 연교 대사 어떤 게 기억에 남느냐고. 아! 그 씬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기정이한테 순수하다고 하는 장면. 사실은 본인이 제일 순수한데. 그때 소담이가 약간 비릿하게 웃는다. (웃음)
서로 어색하니까? 음… 기택은 좋은 사람이면서… 뭐랄까. 기택에겐 대단원이 남은 것이지 않나. 와이프만 (박사장네에) 들어오면 되니까. 연교에 대해서 요만큼의 미안함, 안쓰러움을 가진 게 기택이라고 본다. '이 가족 중에 사모님이 참 착해'라고 유일하게 그런 이야기하는 게 기택이다. (그런 마음을) 조금씩 담으면서도, 서로 약속을 다지는 그런 악수다. '아, 참 이 여자 짠하다. 안쓰럽다' 하는 마음? 그러면서도 '손은 씻었나?' 하지 않나. (웃음) 그 집안 사우나실이 엄청 좁지 않나. 그래서 감독님이 그런 공간으로 한 것 같다. 현장에서 너무 좁은데 키 큰 남자가 들어오니까 너무 어색하지 않나. 얼굴이 여깄으니까. 그런 게 좀 재미있는 긴장감을 주는 것 같다.
▶ 영화엔 나오지 않았지만 연교의 '이후 삶'에 관해 상상해 봤나.
(배우들이) 저 혼자 남았다고 놀린다. (웃음) '연교는 재혼을 할 거야~' 이러면서. (일동 웃음) 다들 놀린다. 왜, 심플하니까? (웃음) 울타리가 필요한 여자라 금방 울타리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무 사회적인 능력이 없지 않나. 자립심이 없고 누군가기 케어를 해줘야 하는 사람이라서. 또, 자기가 (기택네 가족에게) 당했다고 믿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어쩐지 이상하더라고~' 하면서, 괜히. (웃음)
▶ 이 사람의 감정을 경험해 보고 싶었던 캐릭터가 있는지.
문광(이정은 분)! (웃음) 감히 제가 꿈꿔볼 수 없는… 계속 볼 때마다 '저건 뭐지? 참 저 경지는 뭐지?' 이랬다. 나중에 봉 감독님이 써 주시면 해야지. (웃음) 문광은 의도가 없지 않나. 무섭게 나오지만, 그 여자의 심리 상태가 괴기스러운 것뿐이다.
▶ 그동안 출연작은 작품의 내용이나 가치와 무관하게 본인의 몸매나 노출 관련한 이슈가 더 주목받은 경향이 있다. '기생충'은 조여정이라는 배우를 다른 식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신선하다는 평이 나온다.
저는 항상 제 커리어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생각해 보지 못한 포인트다, 그게. 제 생각하고는 좀 다른가 보다. 그냥 모르겠다. (그런 반응은) 저를 아끼는 마음이라고 받아들인다. 여동생 아끼듯 아끼는 마음? (웃음)
다 같이 생각해 볼 만한, 있음 직한 이야기를 하는데 재미있다. 저희끼리도 여러 가지 얘기를 많이 했다. 저는 두 번 보니까 훨씬 더, 더 놀랍다. 생각할 포인트가 바뀌니까 되게 재밌는 것 같다. 사실 저희도 (촬영) 현장에서는 (자세한) 이야기까지 할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은 배우들도 해석을 다시 해 보는 것 같다.
▶ 비평적으로도 흥행적으로도 기대되는 작품에 출연했다는 게 남다른 의미일 것 같다. 봉 감독은 개봉 후에 약간의 변장을 하고 극장을 찾고 싶다고 밝혔는데, 본인도 그럴 생각이 있나.
실감이 안 난다. 이게 어떤 손에 잡히는 무엇이 아니잖나. 실감은 잘 안 난다. 그냥, 그냥 좋다. (웃음) 좀 그런 건 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것. 그것 때문에 너무 좋다. 저는 변장 필요 없다. 원래도 변장 안 하고 다녀서. (웃음) 모자 쓰고 앉아서 보면 되지. 그 마음 다 같다, 감독님 다 이야기하신 게. 보자마자 얘기하고 싶으니까.
▶ 지인들은 '기생충'을 보고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다.
자랑스럽다고! 더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다. 그냥 자랑스럽다고 하더라.
▶ '기생충' 다음에는 어떤 작품으로 만날 수 있나.
아직은 정한 게 없다. (드라마/영화) 가리지 않고 좋은 게 있다면 하고 싶다. 항상 제가 제일 궁금하다, 앞으로 뭘 하게 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