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한국영화 100년을 맞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한국 감독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고 있다. 봉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만큼 화제가 되는 또 다른 내용은 바로 제작스태프와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노동인권에도 힘썼다는 점이다. 이에 방송사도 방송스태프 노동인권 향상에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방송계, 턴키·도급·구두계약 등 열악한 노동환경 여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스태프와 표준근로계약서를 체결하고 정해진 회차 안에 촬영을 마무리하는 등 제작환경과 노동인권에 대해 노력을 기울인 점이 알려지며 더 주목받고 있다. 이에 따라 방송계에도 표준근로계약을 체결하는 등 열악한 방송제작 환경 개선에 더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처럼 높은 비율로 표준근로계약서를 체결하는 영화계와 달리 방송계의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18 방송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2018년 방송 프로그램 제작 참여 경험이 있는 작가, 연출 등 제작 스태프 408명을 대상으로 2018년 10월 18일부터 12월 7일까지 조사 진행)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정한 '방송 프로그램 제작 스태프 표준계약서의 사용 경험'을 살펴본 결과, 드라마 작가가 71.4%로 가장 높은 경험률을 보이며, 드라마 연출 스태프(60.0%), 예능 연출(40.9%)이 그 뒤를 이었다. 표준계약서 사용 경험률이 가장 낮은 직종은 교양 작가(14.1%), 드라마 기술 스태프(18.1%), 예능 작가(22.8%) 순으로 나타나는 등 직군과 장르에 따라 편차가 큰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표준계약서를 인지하고 있는 스태프 일부는 표준계약서 존재와 그 내용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방송사, 제작사와 계약 내용을 자유롭게 협의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그에 준용하는 계약서를 작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토로했다.
2018년 1월부터 조사 시점까지 서면계약을 경험한 제작인력의 비율을 산출한 결과도 비슷하다. 드라마 작가 95.2%, 교양 작가, 23.1%, 예능 작가 36.8%로 집계되어 작가 직군 내 장르별 편차가 크다는 점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드라마 연출 서면계약 경험률은 100%로 비드라마 장르(교양 연출 38.8%, 예능 연출 68.2%) 상황과 비교 가능. 기술 스태프의 경우, 드라마 55.2%, 교양 56.3%로 유사한 수준을 보이는데 예능 기술 스태프의 서면계약 경험률은 32.4%로 다소 낮게 나타났다.
해당 조사에서 인터뷰 참여자들은 구두계약 관행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거나 정식으로 서면계약을 요청할 경우, 평판에 문제가 생기고 다른 업무에 투입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방송 스태프에게도 턴키방식(분야별 용역료 산정기준 없이 총액만을 명시하는 계약 방식)의 계약을 강요하는 관행은 여전하며, 도급과 위탁 계약서를 체결하거나 구두계약을 통해 방송제작에 참여하는 경우도 대다수다.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이하 방송작가유니온)는 지난 28일 성명을 내고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영화의 작품성에 대한 영예뿐 아니라 노동환경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영화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라며 "영화 '기생충'의 성과를 거울삼아 국내 방송사들도 비정규직 프리랜서 등 제작 스태프들을 상대로 표준 계약서를 체결해 노동 인권 보장에 나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라고 강조했다.
방송작가유니온에 따르면 한국 영화뿐 아니라 방송업계에서는 스태프 표준근로계약과 노동시간 준수가 제작비를 높여 적자를 낳고 양질의 영상 콘텐츠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번 영화 '기생충'은 표준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주 52시간을 지키는 등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도 얼마든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한 셈이다.
방송작가유니온은 "오는 7월부터 방송사 정규직들을 상대로 주 52시간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라며 "초장시간의 제작일수와 촬영 시간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 드라마 제작 현장은 말할 것도 없고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야근과 밤샘이 당연시되는 방송작가들의 노동 인권 또한 방송사의 수익 악화와 글로벌 경쟁력을 핑계로 여전히 방치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커져가는 문제 의식과 심각성을 인식해 방송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협의체를 꾸리는 등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전국언론노조와 KBS, MBC, SBS 등 지상파 3사는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 협의체'를 구성하고 드라마 제작환경 관련 쟁점 등을 논의 중이다. 드라마 스태프의 하루 최대 12시간 노동을 원칙으로 하고, 다음 노동일 개시 전까지 휴식을 보장하는 등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효성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도 지난 23일 MBC 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제작 현장을 방문해 방송제작 스태프들의 현장 목소리를 직접 수렴했다. 이 위원장은 "상생의 방송 생태계가 조성돼야 품질 높은 콘텐츠를 지속해서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라고 말하는 등 방송 생태계를 바로잡기 위한 인식은 어느 정도 세워졌다.
남은 건 영화 '기생충'의 제작 환경과 같은 노동인권 준수 현장이 드라마계에도 일상처럼 번지는 것이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처럼 기존에 '관행'이란 이름으로 지속된 열악한 노동환경을 벗어나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드라마계에서는 '여왕의 교실' '결혼계약' '무법 변호사' 김진민 PD나 '하얀거탑' '봄밤'의 안판석 PD가 제작 현장에서 휴식시간 보장 등 노동환경 개선에 힘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민 PD는 과거 인터뷰(2016년 4월 22일 이데일리)에서 "휴식 없이 촬영한다고 해보자. 그렇게 해서 시청률이 잘 나오면 그런 환경에 적응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만드는 사람이 즐거울 수 없다. 만드는 사람이 즐겁지 않다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가장 중요한 게 잠이고, 잠은 자면서 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민식 MBC 드라마 PD는 지난 4월 26일 서울 마포구 상암산로 CJ ENM E&M센터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며 "드라마 촬영 현장을 바꿔야 한다. 안 그러면 너무 힘들다. 이 문제는 어느 방송사인가 하는 걸 떠나서 잘못된 문제"라며 "드라마 제작 관행과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영화 '기생충' 사례에 대해 방송작가유니온은 "지금 이 순간에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관련 뉴스를 전하는 방송사는 봉준호 감독 뉴스를 제작하는 보도국 작가, 특별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 작가와 후반 작업을 맡은 스태프들의 처우를 돌아보기 바란다"라며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에게는 천재적인 재능과 과감한 투자, 훌륭한 배우와 더불어 영화계 자본과 영화 스태프들이 함께 인정한 '규약'이 있었다. 방송사와 제작사는 조속히 노동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신입 작가와 스태프에게 정당한 근로계약서를 전달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이어 방송작가유니온은 "봉준호 감독의 귀국 소식과 함께 방송사들은 봉 감독 섭외에 앞다퉈 들어갔다. 인터뷰를 위해 그에게 연락하고 원고를 작성하고 영상에 입힐 대본을 쓸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라며 "모든 방송사가 봉준호 감독에게 부끄럽지 않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