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8편, 제 나이 마흔다섯, 영화 시작한 지 20년 좀 넘었는데 첫 주연을 맡게 된 라미란입니다. 자신 있게 하려고요, 뭐든." _ 4월 30일, '걸캅스' 언론 시사회 中 라미란
9일 개봉한 영화 '걸캅스'(감독 정다원)는 뛰어난 캐릭터 소화력과 연기력으로 충무로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 온 라미란을 주연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영화 개봉 전 열린 언론 시사회에서 '첫 주연을 맡은' 자신을 소개하는 라미란은 조금은 긴장한 듯 조금은 들뜬 듯했다.
단역배우가 조연이 되는 것, 조연이 주연이 되는 것 그 무엇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영화 안에서 비중 있는 역할이 주어질 확률이 남성 배우보다 낮은 여성 배우라면 더더욱. 라미란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셈이다.
라미란은 처음 주연을 맡았다는 것에 상당한 부담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주연 작품이 들어왔는데 거절한 경우가 있었다. '걸캅스'도 꼭 라미란을 주연으로 한 경찰 영화를 만들겠다는 제작사 측의 요구가 있어 탄생한 작품이다.
점점 주연작 제안이 더 들어오는 상황에서, 그저 고사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지난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라미란은 앞으로는 흘러가는 대로 '막 할 것'이라고 씩씩하게 말하며 웃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사흘 전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영화 어떻게 봤나.
저는 사건 쫓아가는 데 정신이 없어서 (관객분들이) 어디서 웃었는지 궁금하더라. (웃음)
▶ 언론 시사회가 열리는 상영관이 웃음도 울음도 덜 나오는 편인데, '걸캅스' 때는 계속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본인 캐릭터도 웃겼는데 관객들이 어디서 웃었는지 궁금하다니 웃음의 기준이 높은가 보다.
전 가혹하다. 스스로한테 기준이 높다. (웃음) 웬만하면 작품 보고 잘 웃지 않는다. '걸캅스'는 처음 시나리오 읽을 때 정말 멈춰있지 않고 쭉쭉쭉쭉 넘어갔다. 사실 페이지 넘기기 힘든 작품들도 있다. (웃음) 소소한 재미가 있더라. 예를 들면 클럽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는데, 저는 그 행동이 특별히 재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미영이 생각한 건 줄 서는 거다. 미영이라면 그럴 것 같았다. 그때 (입장을 막는 사람이) '88년생 위로는 노래방이나 가라'고 하는 게 있는데 그게 애드립이었다. 여러 가지 버전이 있었다. (웃음)
▶ 그럼 지금까지 엄청 웃었던 작품은 무엇인가.
다 각자의 매력이 있는데 깔깔대고 웃었던 작품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곱씹어 생각하면서 웃을 순 있어도. 제가 되게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다. 감흥이 없고 무디고… (웃음) 뭘 해도 모든 게 예민하고 감성적인 사람이 있는데, 저는 '음음~' 하고 무덤덤한 편인 것 같다. 별로 스트레스나 데미지를 잘 안 받는 것 같다. 건강하게 살려면 이 길을 택해야겠다 싶더라. 스트레스 안 받는 쪽으로.
의협심도 있고 정의감도 있지만 지금은 현실과 많이 타협한,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기 바쁜, 그런 인물. 극중 사건을 계기로 좀 놨던, 잊었던 옛날의 그 어떤 본능들이 훅 살아나면서 갑자기 또 (현장에) 뛰어들게 되는 그런 인물이라고 봤다. (웃음)
▶ 정다원 감독은 처음부터 라미란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정작 본인은 전날(2일) 인터뷰에서 정 감독이 자기를 잘 알았다면 시나리오를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미영이 저와 닮았다는데) 전혀 공감 못 했다. 도대체 날 어떻게 봐서 이런 시나리오를 썼나 싶더라. 주인공으로 해서 쓰겠다고 했는데 (극중 나이가) 40대 초반인데 액션? 액션을 하라고? (일동 웃음) 처음에는 당황했다. 근데 그 안에 담긴, (인물들이) 풀어나가는 얘기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전직(경찰)이 있기 때문에 사건에 뛰어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쉽지 않았겠지만 한 번 움직여봤던 사람이니까 차차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또 언제? (웃음) 더 나이 들면 (액션 연기가) 더 힘들 거고 더 빨리 시작하는 게 낫다고 봤다. 도전이었다. 항상 모든 작품이 그렇지만. 처음 접해 보는 것들을 해내는 것, 그게 연기의 재미인 것 같다.
▶ 미영은 왕년에 각종 상과 표창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전설의 형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당장 내일 잘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퇴출 0순위' 주무관이다. 초반부 미영의 활약상이 멋지게 그려져서 지금의 상황이 약간 의외라고 느껴졌다.
페이크다. (웃음) 그전에 잘 나갔던 형사니까 미영이가 뭔가 한 자리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다가, (지금은 내게) '과자 까세요' 이러는 동료에게도 쩔쩔 매지 않나. 그런 면을 보여주기 위해 페이크를 쓴 거다. 거기서도 되게 막 으쌰으쌰하는 주무관으로 유명하지만, 그다음날 해고당하지 않나. 권고사직인가.
▶ 미영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하는 문건에 미영이 1974년생으로 나와 있던데 사실 그걸 보고 더 놀랐다. 1974년생이 벌써 권고사직 대상이 될 나이인가 싶어서.
요즘은 정말 한 치 앞을 못 내다볼 것 같다. 오히려 젊은이들이 직업이 없어서 힘든 경우도 많은 것 같고.
▶ 40대-20대 전·현직 형사인 미영과 지혜(이성경 분)의 조합이 흥미로웠다.
미영은 현장에서 감과 흥을 되찾는다. 내일 잘릴 사람이지만 내 안에 있던 짜릿한 것들을 꺼낸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혜와 미영이가 알을 깨고 나오는 작품이라고. 이건('걸캅스'는) 어떤 사건에 집중했다기보다는 인물에 집중했다고 본다. 장미도 (국정원) 댓글부대에서 회의감을 느끼고 다시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니 모두의 성장 스토리라고 본다. 다음이 더 기다려지는 거다. 그 다음 사건도? 그 다음 사건도? (웃음) 우리가 소소하게 사이다를 날릴 수 있지 않을까.
지혜의 롤모델이 아마 미영이었을 거다. 오빠(윤상현 분)가 처음 반한 여자를 보고 (지혜는) '여자도 형사가 있구나' 하지 않나. 아마 그날부터 지혜는 준비를 했을 거고, 아마도 (미영이) 롤 모델이었을 것 같다. 지금은 현장에서 뛰지도 않고, 현실에 타협한 주무관이지만.
지혜는 진짜 열정이 앞서서 사고 많이 치고 (웃음) 결국은 징계받는 친구 아닌가. 그런 면에서 식탁 씬에서도 사실 서로 오빠나 남편을 디스하는 게 아니라 서로 디스하는 거다. 이 사람은 가운데 새우 등 터지는 거지.
근데 그 공격이 사실은 애정이 있는 공격이 있는 거다. 미영이 지혜에게 '보니까 짐짝 취급받는구먼' 하는 게 있다. (관심 있게) 봐서 아는 거다. (웃음) 하나의 사건을 쫓아가면서 공조하게 되는데 그게 결국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표현하기가 부끄러웠을 뿐이지. 늘 깔려 있으니까 같이 살지 않을까?
웃긴 게 지혜랑 저랑 거리낄 것 없이 서로 막 까지 않나. 그게 그들의 친밀도를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쿡쿡 옆구리 찌를 수 있는 그런 관계, 그만큼 애증의 관계구나 싶은? 더 으르렁대고 그런 장면이 있는데 그게 편집됐다. (지혜가 미영에게) '언니는 뭐 어쩌고저쩌고' 하는 장면. 식탁에서 밥 먹을 때 장면이 (두 사람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씬이 아닌가 싶다.
▶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특기생이란 과거 설정도 있고, 몸도 잘 쓰는 형사 역이라 준비를 많이 했을 것 같다. 액션 연기해 보니까 어땠나.
제가 평소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할 때보다 찍어놓은 걸 볼 때 더 재미있더라. '오~ 괜찮은 것 같아' 하는 재미가 있다. (웃음) 합을 만들어가는 것도 좋고. 다른 것보다 초반에 찍었던 과거 씬이 생각난다. 처음에 나쁜 놈들의 다리를 꺾어 뒤로 넘기는 장면이 있다. 찍을 때는 몰랐는데 되게 장풍 날리는 것 같고 (웃음) 멋있더라. 혼자 멋있는 척 폼을 다 잡지 않나. (웃음) 그게 첫 초반 촬영이다 보니까, (액션의) 맛을 딱 느낀 장면이랄까. 재밌었다.
▶ 마지막 액션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저도 이렇게 (긴장하며) 봤다, 힘주고. (웃음) 거기가 완전 돌바닥이니까 액션하시는 분들도 애를 먹었을 것 같다.
▶ 다친 데는 없나.
다행히도 경미한 정도다. 손 좀 꺾이는 정도? (웃음) 타박 정도? (일동 웃음)
애드립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연기를 애드립처럼 했나 보다, 자연스럽게. (웃음)
▶ 그래도 현장 경험이 가장 풍부한 선배니까 본인이 분위기를 주도했을 것 같다.
아니, 저는 (웃음)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그런 재능은 없는 것 같다. 편하게, 즐겁게! 현장은 항상 즐거워야 한다는 게 모토라서. (서로) 부담스럽고 신경 쓰이고 눈치 보고 그러면 망한 거다.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래야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근데, 그래서 제 역량을 발휘 못 했다. (일동 웃음) 제가 웃겨야 하는데 저만 눈치 봤다. 애들은 확 들어오면서 너무 잘해줬다. (웃음)
▶ 언론 시사회 때 영화를 한 지 20년 넘었는데 첫 주연을 맡았다고 한 인사말이 인상적이었다. 데뷔작을 무엇으로 두나.
영화로 보면 2005년 '친절한 금자씨'다. 무대(경험)까지 하면 25년? 24년이 된 거다.
▶ '걸캅스'로 첫 주연작을 찍었다는 데 감격하면서도 긴장하고 걱정하는 모습도 보였다. 단역→조연→주연으로 가는 것은 좋은 일일 것만 같은데 부담도 많이 되나 보다.
아무래도 그 책임감이라는 무게가 있으니까… 저는 가늘고 길게 오래가고 싶은데, (주연이면) 이끌어가야 하고, 그만큼의 (어떤) 것을 토해내야 한다. (주연을 맡았다고 연기를) 어떻게 갑자기 잘할 수 있겠나. 연기하는 것 외의 부담감이 있긴 하더라. 흥행도 신경 쓰이고. 말하는 거 하나하나도 신경 쓰이고. 조연하고 이럴 때는 막 던지고 '카피(제목)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하기도 했는데 (웃음) 이제는 어떻게 나갈지… 제가 그나마 (이런 거에) 신경 안 쓰는 배우인데도 어쩔 수가 없더라. (웃음) 몇 개 더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허세 막 잔뜩 들어가지고 '안녕하십니까~' 이러는 거 아냐? (웃음) 전 원래 그래서 변했단 소리는 안 들을 거다. (일동 웃음)
▶ 그동안에도 주연작이 들어왔는데 고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 그냥 몇 개… (웃음) 그냥 못 하겠더라. 부담스러웠다. 주연이라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걸캅스') 대표님하고는 약속이 돼 있어서 그냥 무조건 했어야 했다. (저의) 첫 번째 주연(작)은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하셔서. (웃음)
막 해야 한다, 인제. (웃음) 제 모토지만 정말 막! 그냥 흘러가는 대로. 이제 고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정말 이제 제가 (조연을) 하고 싶어도 주연을 한 번 해서 그런 건지 주연 시나리오를 주시더라. 부담스러워서도 부딪혀야 하는 거다. 하다 하다 안 되면 다른 역할로 불러주시겠지. 그만하라고 그럴 때까지. (웃음)
▶ 연기를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그때와 지금 가장 달라진 건 무엇인가.
변한 건 제가 외모가 많이 젊어졌다. (일동 웃음) 옛날보다 회춘했단 얘기 많이 듣는다. 안 변한 건 성격? 무대할 때도 사실은 거침이 없었고 하고 싶은 얘기 다 하고 살았기 때문에… 지금 와서 애가 더 유명해져서 이렇게 됐다, 달라졌다 이런 얘기는 안 들을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웃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