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비롯한 문화 콘텐츠에는 필연적으로 현실인식과 시대정신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마블 히어로물은 지난 10년에 걸쳐 비주류 서사를 주류 문법으로 변화시키는 데 탁월한 공을 세웠다. 그렇게 확장해 온 대서사시를 3시간 안에 온전히 쏟아부은 '엔드게임'은 성공적이다.
이 영화는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헐크(마크 러팔로),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등 타노스와의 혈투에서 살아남은 히어로들이 활기 잃은 지구에서 사는 모습을 비추는 데 초반 1시간가량을 할애한다. 이 영화 전반에 깔린 '상실'의 정서를 강화하기 위함이리라.
'엔드게임'의 문을 여는 호크 아이(제레미 레너) 에피소드는 그러한 정서를 관통한다. 이 영화 서사와 직결되는 전작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엔딩 시퀀스로 관객들이 이미 경험한 상실감을, '엔드게임'은 이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잔잔하면서도 강도 높게 환기시키는 셈이다.
물론 마블 영화를 익히 봐 온 관객들은 이러한 묘사가 마냥 무겁지만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지난 2008년 '아이언맨' 이후 10년간 차곡차곡 쌓여 온 마블 히어로들을 향한 관객들의 애정은 각각의 캐릭터가 지닌 특징적인 유머 코드로 인해 터지는 웃음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토르의 첫 등장은 예상 밖이다. 그것이 그가 감내해 온 극심한 아픔을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돌이킬 수 없다'는 체념이 '돌이킬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 '엔드게임'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키워드는 시간여행이다. 이 과정을 통해 상실감에 허덕이던 히어로들은 각자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는 뚜렷한 당위성을 확인한다. 이는 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히어로들의 각기 다른 선택을 위한 명분이 된다.
'엔드게임' 여정의 끝은 최강 적과 벌이는 마지막 혈투다. 단죄했던 그 존재를 다시 극으로 불러들여 화해와 연대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이야기 흐름에서는 할리우드 시스템이 자랑하는 집단 지성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여성, 흑인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에 맞서 이들 소수자를 극의 중심으로 불러들인 전작들의 성과를 새삼 상기시키는 장면들도 눈길을 끈다. 마블 히어로물 10년 역사를 응축한 듯한 "어벤져스, 어셈블!"(Avengers, assemble!)이라는 대사에 담긴 카타르시스 또한 강렬하다.
이미 예고된 대로 '엔드게임'을 끝으로 더는 마블 영화에서 만날 수 없게 된 히어로들이 있다. 극중 각자의 소신과 시대의 가치를 지키려는 선택에 따른 이별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후대에게 그 자리를 넘겨준다는 데서 그들의 퇴장은 명예롭다. "3000만큼 사랑해"라는 대사의 무게와 여운을 곱씹는 일은 결국 관객들 몫으로 남을 듯하다.
24일 개봉, 상영시간 180분 57초, 12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