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남성 주인공이나 여러 명의 남성 주인공이 기본값처럼 여겨지는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구도다. 그렇다고 여성 캐릭터 여럿이 나온다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떤 상황을 맞았을 때 느끼는 복잡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담아내고자 애쓴 흔적이 보인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윤석 감독은 연출할 때 가장 신경 쓴 것으로 염정아-김소진-김혜준-박세진 네 사람의 얼굴을 들었다. 이 배우들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보겠다는 패기가 있었다고 부연했다.
그만큼 배우들을 믿었다. 훌륭한 연기를 해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교하게 풀어내기 위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원작 연극을 쓴 이보람 작가를 비롯한 스태프들, 네 명의 여성 배우들, 아내와 두 딸까지. 곁에 있는 여성들에게 많이 물어봤다. 김윤석은 들어내려고 했으나 아내가 절대로 빼지 말라고 해서 살아난 장면도 있다.
일문일답 이어서.
▶ 이제 감독님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졌나.
현장에서는 선배님이라고 많이 불렸다. 저는 연출이란 말이 더 자연스럽다. 연극할 땐 연출이라고 하니까, 감독이라고 안 그러고.
▶ 감독으로서는 이번이 첫 인터뷰인데 소감이 어떤가.
솔직히 힘들다. 그래도 질문이 구체적이더라. 배우에게는 아무래도 (질문하기) 막연한 부분이 있다. 구체적인 질문을 하시니 윤곽 잡기는 오히려 쉽더라.
▶ 첫 작품이라 더 신경 쓸 부분이 많았을 것 같다. 부담도 되고.
나는 연출을 하게 되면 드라마와 배우만 가지고 한 번 찐하게(*'진하게'가 맞는 표현이지만, 배우 본인이 '찐하게'라고 했다) 가 보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다. 이 영화를 5년 만에 보여드렸는데, 제가 카메라를 알면 얼마나 알겠나. 장르적인 부분에 대해 자신도 없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는 드라마와 사람으로 승부를 거는 영화고, 그런 걸 하고 싶었다. 그런 작품을 좋아하고 그런 게 생명력이 오래 가더라. 세월이 지나서 꺼내도 새로운 면이 보이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작품으로 선택한 게 드라마와 연기를 바탕으로 하는 '미성년'이었다.
▶ '미성년'을 소개하면서 배우들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연출하면서 가장 욕심 낸 부분은 역시 배우들인가.
네. 배우다. 이 네 명 배우의 얼굴이다. ('미성년'엔) 굉장히 타이트한 장면이 많다. 이 타이트하게 잡은 얼굴, 네 명의 배우를 통해 하고 싶은 얘기를 여기다 다 싣겠다는 마음이었다. 중견 여성 배우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배우 출신 신인 감독으로서 패기 있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정말 외국의 좋은 중견 배우분들을 보면 너무너무 잘하지 않나.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건 저 장면을 주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고. 우리(배우도) 다 할 수 있는데 왜 저런 장면을 안 주지? 했다.
영화를 보면 상황과 위치 이런 것을 설명하느라 시간을 다 뺏긴다. 정작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이 영화는 오히려 그것(내면)으로 승부를 걸 수 있다. 굉장히 (이야기를) 압축시켜서 본 게임으로 들어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장면 구성에 신경 쓴 부분이 바로 그거다.
그분들은 긴장하실 분들이 아니다. (웃음) 진짜 선수들이고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집중하시는 분들이다. 그냥 동료 배우로 다가가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감독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쓸 땐 이런 느낌으로 썼다' 이런 식으로 동료 배우로 다가갔다. 의미가 바뀌지 않는 한, 어떻게든 대사 바꿔도 되고 자기화해도 된다고 했다. 상의하면서 했다. 모니터 보면서 (배우들이) 놓치는 게 있을 때만 제가 가서 얘기했다. 워낙 선수들이라…
▶ 배우들은 김윤석 감독이 배우 출신인 만큼 세세한 부분까지 짚어줘서 원 포인트 레슨을 받는 것 같다고도 했다. 밑천이 드러날까 봐 걱정된다고 하기도 했고.
원 포인트 레슨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많이 한 적 없고 같이 상의했다. 그분들이 센스가 굉장히 뛰어난 분들이라서.
▶ 오디션으로 뽑혀 각각 주리, 윤아 역을 연기한 김혜준, 박세진 이야기도 듣고 싶다.
4차에 걸친 오디션으로 500:2의 경쟁에서 뽑은 게 주리와 윤아였다. 김혜준, 박세진 두 분 외에도 정말 연기자로서 자질이 좋은 분들이 많았다. 외모의 개성, 앙상블도 봐야 해서 결국 두 분으로 뽑힌 거다. 주리와 윤아는 처음부터 신인 오디션으로 뽑고 싶었다. 여고생 역할을 자주 하는 분 중에서도 물론 너무 연기가 좋은 분들이 있다.
두 사람도 대학생인데 (대중은 그걸) 모르지 않나. 신선한 얼굴이 필요했다. 되게 잔상이 없는? 저의 기준은 그거였다. 서툴지만 뭔가를 흉내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 왜냐하면 뭔가 흉내 내려고 하면 한계가 너무 빨리 온다. 서툴지만 지문처럼 자기 목소리를 내면 정말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소리가 된다. 기술이나 이런 거로 자기를 막는 느낌이 아니라, 열려 있고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느낌에서 두 사람을 뽑았던 거고, 크랭크인하기 전 한 달 반 정도 계속 연습했다.
저예산이고 되게 타이트하게 2달 안에 42회차로 찍어야 해서 준비하고 연습해야 했다. 계속 저랑 다니면서 밥 먹고 맥주 마시고 사는 얘기도 하면서 (장벽을) 허물었다. 그게 크랭크인할 때도 주효했던 것 같다. 염정아 씨가 (둘을 보고) '이미 주리, 윤안데?' 했을 정도로.
▶ 제작보고회나 언론 시사회 때도 여러 차례 나온 얘긴데,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저렇게 잘 살리나 하는 평이 많았다. 배우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고.
네, 그런 칭찬 받고 싶었다. (일동 폭소) 이건 도전이고 공부고 해내고 싶은 것이다. 작가가 여성이고, 배우도 여성 네 사람이었다. 집사람, 우리 애들도 있었다. (제가 남자이니)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는 건 물어보면 되지 않나. 조언을 들으면 되고.
영주(염정아 분)가 통장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집문서, 통장이 전부 다 대원(김윤석 분)의 명의로 되어 있지 않나. 그 장면을 찍고 나서 편집하면서 이건 들어낼까, 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제 아내가 절대로 들어내지 말라고 하더라. (웃음) (주리의) 돌 반지 그대로 있는 것도 '그거 들어내지 마'라고 하더라. 너무 현실적인 느낌이 많이 오는 거라. 또, (미희가 아기에게) 먹이지 못한 모유가 배어 나와 (옷에) 얼룩지는 건 우리 작가랑 상의한 부분이다. 저도 두 번이나 봤고. 정말 많이 상의하고 많이 물어봤다. 그런 디테일이 주는 힘 같은 것도 있지 않나 싶다.
원작(주인공)이 여성이니까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한 인간의 용기를 보여주고 싶었고, (잠시 침묵) 저는 중견 여성 배우들을 통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삭이고 참고,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 이 여성 배우 두 분이 너무나 적역이었다.
▶ '미성년'을 만들면서 실무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다면.
저희 스태프들이다. 가장 많은 도움을 줬다. '암수살인' 황기석 촬영감독도 있고 시나리오는 홍지영, 나홍진 감독에게도 보여줬다. 그분들이 용기를 줬다. '되게 독특한 시나리오다. 근데 투자는 될지 모르겠다'고. (웃음) 그렇잖나. 시나리오만 보면 상업적인 메리트가 있어보이는 영화가 아니다. 되게 난항을 겪다가 다행히 용케 전 쇼박스 대표(현 메리크리스마 대표)님이 '우리가 투자하고 싶다, 다만 예산은 많이 못 준다'고 했다. (웃음) 비교적 저예산으로 했다. 정말 제가 운이 좋은 게 시나리오를 주연 배우에게 보냈는데 하루 만에 오케이를 받았다. 'SKY 캐슬' 하기 전인데 염정아 배우님이 정말 흔쾌히 오케이를 해 주셔서 일사천리로 다다다닥 진행된 것 같다.
▶ 염정아가 주연을 맡은 JTBC 드라마 'SKY 캐슬'이 대박 나는 걸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아, 땡큐 아닌가? (일동 폭소) 진짜 땡큐다, 땡큐. 한쪽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내 거('미성년')로 포텐을 터뜨려야 하는데… (웃음) 혜윤 씨도 오디션을 봐서 그 역할로 캐스팅돼서 '미성년' 찍었는데 'SKY 캐슬'로 유명해졌다. '아, 분량이 너무 적은데 어떡하지. 미안한데' 이랬다. (웃음) 우리가 훨씬 먼저 찍었다. 2018년 2월에 찍은 거다. (김혜윤이 맡은 역할은) 깍쟁이같이 공부 잘하는 애여서, 주리랑 둘이서 경쟁하는 느낌? 근데 저는 'SKY 캐슬'을 다 못 봤다. 한창 후반 작업할 때라. 그래도 자신 있다. 우리가 먼저 했으니까. (웃음)
▶ 혹시 '미성년'을 연출하며 참고한 작품이 있나.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다. 제가 2002년에 이 작품으로 공연을 했다. 유진 오닐의 자전적인 얘기다. 자기 가족 얘기다. 슬프고 끔찍한 연극인데 (저는) 막내아들 에드몬드 역을 했다. 거기서 모르핀 중독자로 나오는 엄마 메리 역할을 예수정 선생님이 하셨고, 아버지 제임스 역할을 주진모 선배가 했다. 3시간 40분짜리였는데 2시간 하고 10분 쉬고 1시간 40분을 했다. 그 연극 연습을 6개월 했다. 예수정 선생님이 이걸 진짜 하고(무대에 올리고) 싶으면 6개월 이상 연습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 가족이 너무너무 무서운 거다. 1900년대 초의 이야기인데, 즐거운 나의 집이 완전하고 완벽한 감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거다. 빠져나가려야 빠져나갈 수 없는 장소가 된 거다. 그럼 과연 우리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미성년'도 가족의 이야기지 않나. 주리는 아빠의 외도를 본인이 알게 된 후 엄마 모르게 수습하려는 입장이다. 비극으로 몰아가려면 끝도 없이 몰 수 있는 거다. 빠져나갈 곳이 없을 때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그 모습을 담고 싶었고 그래서 제가 이 영화를 만든 거다.
성년은 죽는 날까지 계속 노력을 해야 하는 것 같다. 이게 무슨 자격증이 아니지 않나. 자칫 잘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성년의 모습이지 않나. 저도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욕을 너무 쉽게 하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불쾌해한다. 특히 제 아이와 손잡고 가고 있을 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에 대한 긴장감은 아마 죽는 날까지 가져가야 할 것 같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은 자기가 스스로 지켰으면 하는 마음이다. 저도 노력해야 하고.
▶ '미성년'은 '중년'과 '가족'에 초점을 맞춘 영화로 보이는데, 맞나.
그건 보는 사람의 자유인 것 같다. 약간 코미디적이긴 하지만 대원도 방파제 가서 바닷가 할머니한테 삥 뜯기고 오토바이 타는 애들한테 린치당하지 않나. 밑 세대와 윗세대에 낀 중년으로 우왕좌왕하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도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주리와 윤아다.
▶ 중년으로 살면서 현재 위기를 느끼나.
제가 어느 순간에 무뎌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제가 노래 듣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더 이상 젊은 친구들의 노래를 안 듣고 있더라. 이럴 때가 온다. 무뎌지고 있다는 게 가장 무서운 느낌이다.
▶ 중년이 되고 나서 새 노래를 안 듣는다고 했는데 가장 최근에 즐겨들은 곡이 뭐였나.
이소라의 '신청곡'. 이소라 씨 팬이다.
▶ 영화 '미성년'으로 바라는 목표가 있다면.
일단 이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어야지 은퇴작이 안 될 거 같고. (일동 웃음) 은근히 용감하고 굉장히 과감한 영화다. 이런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싶다. 저는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 4명의 모습이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제가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는 그 사람들 표정에서 다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멋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뛰어난 배우들이 있다는 것도 너무 자랑스럽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