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과 네명의 여인들

[임시정부 27년의 기록 ⑪] 엄혹했던 임시정부 시절, 김구 선생의 여성 조력자들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속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취는 크다. 1919년 3.1 운동의 촉발을 계기로 구성된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부터 주석까지 임시정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또 자금난과 일제의 탄압 등 고난 속에서도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휘하는 등 김구 선생은 역사적 사건 속에 이름을 써내려가며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홍구(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김구 선생은 피난 생활을 하며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그 시절 김구 선생 곁을 꿋꿋이 지키며 그의 대업을 위해 희생하고 소리없이 지원했던 네명의 여성 조력자가 있다.

백범 김구 선생 흉상 (사진=배덕훈 기자)
◇ 부인 최준례 여사

김구 선생은 1906년 31세의 나이로 최준례 여사를 부인으로 맞는다. 당시 부인의 나이는 18세였다.

김구 선생이 남긴 백범일지에는 당시 최 여사와의 일화가 짤막하게 소개돼 있다.

백범일지에는 당시 최 여사가 어릴 적 모친에 의해 이웃동네에 사는 청년과 조혼이 예정돼 있었는데, 최 여사가 장성한 후 이를 부인해 문제가 됐다고 적혀있다.

이후 조혼 풍습의 여러가지 폐해를 절감한 김구 선생이 최 여사에게 동정심이 생겼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게 된다.

결혼 후에도 김구 선생은 옥고를 치르는 등 부인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최 여사는 이러한 김구 선생의 뒷바라지를 하며 묵묵히 가정을 지켰다.

1919년 3.1 운동 직후 김구 선생이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자 최 여사도 이듬해인 1920년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를 찾는다. 조국을 떠나 묵묵히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김구 선생은 상하이 영경방 10호 건물에서 가족과 함께 잠시나마 단란한 생활을 이어갔다.

2년 뒤인 1922년 최 여사는 둘째 아들 김신을 출산한다. 하지만 최 여사는 출산 후 몸조리 과정 중 계단에서 실족해 크게 다치고 폐병 까지 얻는다.

최 여사는 상하이에서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던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결국 병사하고 만다. 당시 일제에 수배중이었던 김구 선생은 일본인 거류지역에 있는 병원을 찾아갈 수 없었다. 아내의 문병부터 임종까지 함께하지 못한 것이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독립운동 기간 중 혼례나 장례의 성대한 의식으로 금전을 소비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았다. 이에 아내의 장례는 극히 검약하게 하기로 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임시정부 동지들이 '김구 선생의 내조를 하며 겪었던 최 여사의 고초야 말로 나라일에 공헌한 것'이라고 높게 평가해 김구 선생의 뜻을 꺾고 프랑스 조계지였던 숭산로 공동 묘지에 매장한 뒤 장례식을 치르고 묘비를 세워준다.

유명 한글학자 김두봉 선생이 쓴 묘비에는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이라고 적혀 있다.

후일 최 여사의 시신은 고국으로 돌아와 안장되지만 묘비는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 모친 곽낙원 여사

김구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는 키가 작았지만 기개는 장대한 '단구의 거인' 이었다. 아들인 김구 선생이 형무소를 전전할때도 아들을 끝까지 신뢰하며 격려를 이어갔다.

1922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건너온 뒤에도 곽 여사는 김구 선생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며느리인 최 여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김구 선생의 두 아들을 돌보며 헌신했다. 상하이에서의 임시정부 재정이 빈곤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최 여사는 둘째 김신을 데리고 1925년 귀국길에 오른다.

고국에 도착해서도 그녀는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생활비를 절약해 금전을 보냈고, 임시정부 생활이 더욱 어려워진 것을 알아채고 김구 선생의 첫째 아들 김인 또한 귀국을 명령한다.

이후 곽 여사는 김구 선생의 두 아들과 함께 1934년 4월 자싱에서 김구 선생과 해후한다.

곽 여사는 9년만의 모자 상봉에서 "나는 지금부터 시작해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데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라고 첫마디를 건네며 대쪽같은 성품을 드러냈다.

김구 선생은 이같은 모친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백범일지에 서술했다.

곽 여사는 이후의 임시정부 고난의 피난길에도 김구 선생 및 임시정부 요인들과 끝까지 함께 하며 독립운동에 이바지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피난 말기 류저우에서 얻은 인후증(咽喉症)은 고령의 거인을 약화시켰고, 결국 그녀는 1939년 4월 인후증과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치장에서 사망한다.

곽 여사는 사망하기 전 "독립이 성공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는 유언을 남긴다.

김구 선생도 모친의 죽음과 관련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하셨다"면서 "노복(奴僕)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셨다"고 회고했다.


대쪽같던 강철의 여인, '단구의 거인'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독립운동을 임종 때까지 지원한 든든한 조력자였다.

뱃사공 주애보
◇ 뱃사공 주애보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후 자싱(가흥) 피난길에서 만난 뱃사공 주애보는 김구 선생의 외로운 피난길을 함께 해준 조력자였다.

김구 선생은 절강성장을 지낸 저보성의 도움으로 자싱에서 피난 생활을 이어갔다. 뱃사공이었던 주애보는 광동인 장진구, 혹은 장진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던 김구 선생과 함께 5년 여간 생활했다.

김구 선생은 이때의 생활을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고, 낮에는 땅 위에서 행보나 할 뿐이었다"며 선중생활(船中生活)을 회고했다.

무려 37세의 나이차에도 두 남녀의 사이는 각별했다. 선중생활을 마치고 자싱을 떠나 난징에서 활동하던 김구 선생은 일제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주애보를 난징으로 데려오는 결단을 내린다.

김구 선생은 난징에서 주애보와 위장 부부 생활을 하며 회청교에서 고물상 행세를 해 일제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결국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의 폭격 등으로 인해 난징 조차 위태로워지자 김구 선생은 난징을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주애보와 이별한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후 종종 후회 되는 것은, 송별할 때 여비 100원 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근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 모르는 사이 우리는 부부같이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라고 아쉬움을 남긴다.

뱃사공 주애보는 외로웠던 피난길에서 김구 선생 곁을 함께 지켜준 각별했던 여인이자 지원군이었다.

저보성의 며느리 주가예
◇ 저보성의 맏며느리 주가예

저보성의 도움으로 상하이를 탈출한 김구 선생은 자싱에 있는 저보성의 양아들 진동생의 집에서 피난 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망이 조여오자 김구 선생은 또다시 피난길에 오르는데, 이때 여성의 몸으로 당차게 위험과 고생을 무릅쓰고 김구 선생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 인물이 주가예다.

1932년 7월 주가예는 시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김구 선생을 자신의 친정 소유였던 하이옌(해염)의 재청별장으로 피신시킨다.

김구 선생은 그 당시 고된 피난길을 백범일지에 서술하는데 주가예에 대한 도움 부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저씨 부인(주가예)은 굽 높은 신을 신고 7~8월 불볕 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었다. 저씨 부인의 친정 여자하인 하나가 내가 먹을 식료·육류품을 들고 우리를 수행하였다.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하여 만대 자손에게 전해줄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활동 사진기가 없는 당시 형편에서 어찌할 수 있으랴.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

주가예는 이처럼 당찬 모습으로 김구 선생을 안전히 피난시킨다. 목적지인 재청별장에 도착해서도 고용인에게 "저 양반의 식성은 이러이러하니 주의하여 모시고, 등산하면 하루에 3각을 받고 기타는 얼마를 받고, 응과정을 가면 4각만 받아라"고 지시하는 등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날로 작별을 해 본가로 돌아갔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가예 역시 백범일지에도 강렬히 소개돼 있는 만큼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 역사 속 한 장면을 꿰찬 든든한 조력자였다.

글 싣는 순서
①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②100년전 4월 혁명의 거점 상해에선 무슨일이
③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④중일전쟁 발발로 풍전등화의 처지 임정
⑤내부의 적이 쏜 흉탄에 갈등의 골만
⑥위태로운 임정에 가해진 네 발의 총격
⑦지독히도 임시정부를 괴롭힌 일본군의 폭격
⑧한국 청년들의 멋과 흥으로 유주 땅을 뒤흔들다
※[팩트체크] 1948년 건국 논란, 이승만도 부정했다?
⑨임정의 정신적 지주 이동녕 타계하다
⑩독립은 별안간 밤에든 도둑처럼 찾아왔다
⑪백범과 네명의 여인들
(계속)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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