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착륙한 광복군, 일본군에 포위됐다

[광복군의 함성⑥] 갑작스런 해방 뒤에도 분투
정진대 이륙했던 시안비행장, 지금은 주택가로
무장한 일본군 만났지만 '일촉즉발'…결국 후퇴
장준하 "그때 죽었더라면 역사 달라졌을 것"

중국 산둥성(山東省) 웨이현(濰縣)에서 촬영한 정진대·OSS 사진(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일제 패망으로 갑작스런 해방을 맞은 뒤에도 광복군과 임시정부는 국가기관 역할을 이어가기 위해 분투했다.

광복군 일부는 잠깐이지만 국내에 곧바로 진입했고 임시정부 측도 주권회복을 외치며 재외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자처했다.

◇ 파리 입성한 드골 장군처럼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씨쏘먼(西稍门) 주택가의 한 슈퍼마켓. 간판에 적힌 '기장(机场)'이라는 문구를 통해 과거 이곳에 공항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취재진을 만난 상점 주인은 "시안비행장이 1991년 셴양(咸陽)으로 옮기기 전까지 여기 있었다"라며 "처음 동네에 왔을 땐 민항기만 취항했는데 그전에는 군용 비행장으로도 쓰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씨쏘먼(西稍门) 주택가의 한 슈퍼마켓과 상점 주인. 간판에 적힌 '기장(机场)'이라는 문구를 통해 과거 이곳에 공항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김광일 기자)
한국광복군 정진대가 이곳에서 미군 C-47 수송기를 타고 한반도를 향해 이륙한 건 일제 항복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앞서 같은 활주로에서 출발했지만 서해 상공에서 위협을 감지해 회항한 지 이틀 만이다.

독립기념관이 정리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등에 따르면 정진대 주요 임무는 일본군 무장 해제, 일군 징병 한인 인수, 국민자위군 조직 등이었다. 국내 정보 수집, 중요 문서 압수, 연합군 포로 구호라는 미국 측 요구도 받았다.


수송기에 탄 정진대원은 대장인 이범석 장군과 장준하·김준엽·노능서 등 4명. 미국 전략첩보국(OSS) 특수훈련을 받았던, 광복군 제2지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정진군 94명 가운데 최종 선택된 이들이다.

함께 소집된 3명은 비행기 적재 무게 한계로 직전에 빠졌다. OSS 측 탑승자는 18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한국계 미군 장교 정운수·함용준·서상복이 이름을 올렸다.

파견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항복 예비접수'를 명목으로 미국 측을 설득한 끝에 이뤄졌다. 국내 진입을 통해 2차 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려 했던 임시정부는 일제 항복 선언에 아쉬워하면서도 곧바로 긴급회의를 열어 작전을 의결했다. 영국에서 독립운동하다 군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한 프랑스 드골 장군의 전례를 따르려 한 것이다.

지난 2015년 8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C-47 수송기 전시회 ‘70년 동안의 비행’ 개막식이 열렸다. 여의도공원에는 정진대원들이 탑승했던 것과 같은 기종의 C-47 수송기가 현재도 전시돼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 해방된 조국에 가장 먼저 진입했지만

정진대는 비행 8시간 만인 이날 오전 11시쯤 바닥에 모래가 휘날리던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국외 독립운동 세력 가운데 해방된 조국에 가장 먼저 진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건 돌격 태세의 일본군이었다. 무장한 일본군이 수송기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좁혀왔고, 50m쯤 떨어진 격납고 앞에는 1개 중대가 있었다고 故장준하 당시 대위는 회고했다. 일촉즉발. 중형 전차의 기관포도 정진대를 향해 있었다고 한다.

OSS 총 책임자였던 미국 버드 대령은 자신들의 임무와 성격을 일본군에 설명하고, 상부에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일군은 "본국으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 못했다. 돌아가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故장준하 선생 장남인 장호권 한신대 초빙교수가 지난 1월 29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광일 기자)
장준하 장남 호권(70) 한신대 초빙교수는 "장 선생은 종종 김준엽 선생과 함께 '그때 교전하고 다 산화했더라면 우리도 승전국으로 인정받지 않았을까'라며 아쉬워했다. 만약 그랬다면 저는 태어나지 못했겠지만 대한민국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겠나"라고 말했다.

정진대와 OSS는 그렇게 하루 동안 일본군과 '불편한 동거'를 한 뒤 다음 날 오후 28시간 만에 후퇴했다. 연료 문제로 중국 산둥성(山東省) 웨이현(濰縣)에 불시착한 뒤 허탈한 마음으로 시안에 돌아가야 했다.

이후 충칭에서 대원들을 만났던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은 CBS노컷뉴스 취재진에게 "대원들은 중국 국민당 군복을 입고 중국 사람 행세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빈손으로 돌아오기가 좀 아쉬웠겠나"라고 했다.

광복군 제2지대 간부들과 미국 OSS 대원들(사진=독립기념관 제공)
◇ 임시정부는 정부로, 광복군은 국군으로

급작스런 해방을 맞은 충칭의 임시정부도 분주하긴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국회 격인 의정원 회의에서는 국무위원 총사직 등의 안건을 놓고 대립한 끝에 국내에서 각계 대표로 구성된 과도정권을 수립한 뒤 임정의 기능을 넘기기로 의결했다.

그러면서 중국, 베트남, 버마, 태국, 인도 등 해외 체류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을 추진했다. 특히 일제 패망 뒤 한인들이 중국인에게 재산을 뺏기거나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중국 정부에 보호를 요청하고 '한교선무단'이라는 기구를 조직해 각지에 파견했다.

하지만 미 군정으로부터 공식 정부의 지위를 승인받지 못한 채 그해 11월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물론 시민들은 환영했다. 김구 주석 거처이자 환국 이후 임정 청사로 썼던 서울 서대문 경교장 근처가 인파로 붐볐고, 환국 행사가 열린 동대문 운동장에는 15만명이 몰렸다고 서울신문 등은 보도했다.

서울 종로구 평동 소재 경교장 1층 응접실. 해방 후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국무회의를 열었다. (사진=김광일 기자)
지난 26일 오전 이낙연 국무총리가 서울 종로구 평동 소재 경교장을 찾아 독립운동과 해방 직후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김광일 기자)
경교장 시절 임시정부는 여러 차례 국무회의를 열었고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한 범국민적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분단을 막고자 좌우합작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정부로, 광복군은 국군으로 이어졌다.

독립기념관 이준식 관장은 "우리나라가 2차 대전 식민지 가운데 가장 먼저 독립을 약속받았던 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피 흘리고 목숨을 바친 결과"라며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중국 시안의 광복군 연구자 배근흥 섬서사범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한국에서 광복군을 선전하는 얘기는 많지만 그들이 얼마나 곤란을 겪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며 "험난한 두취진에서 어렵게 살아남았던 역사를 후세에 꼭 전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광복군 연구자 배근흥 섬서사범대 역사문화학과 교수(사진=김광일 기자)
당시 광복군의 훈련을 모형으로 재현한 모습(사진=독립기념관 제공)
※ 이 기사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부터 감수를 받았습니다.

글 싣는 순서
※총을 들었고, 정세를 읽었다. 임시정부에 모인 선열들은 목숨을 내걸고 자주독립을 그렸다. 주권회복 과정이 일제 패망이라는 외적 요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다. CBS노컷뉴스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충칭과 시안을 찾아 광복군의 피와 땀을 추적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광복군 '국내침투' 비밀 훈련장, 절벽에 메아리가 쳤다
② 대륙을 흔든 독립운동, '광복군 오페라' 아리랑
③ 중국에 '독립 노력' 약속 받아낸 터, 최초 확인
④ "여기는 충칭, 동포들 듣고있나"…임시정부 라디오방송
⑤ '갈등 너머 하나로'…임시정부에 뭉친 독립군
⑥ 여의도 착륙한 광복군, 일본군에 포위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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