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직 광주 3·1 운동이 최초로 시작된 장소와 집회 경로 등 가장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무엇보다 당시 3·1 운동의 모습을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재판 판결문조차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광주CBS는 광주 3·1 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자처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광주전남지역 3·1 운동을 집중 조명하는 특집 기획을 마련한다. 광주CBS는 이번 특집 기획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방대한 사료를 검토하고 사학자와 기독 사학자 등 관련 전문가들을 광범위하게 만나 광주 3·1 운동을 가장 정확하게 기록하는 데 중점을 뒀다.
<광주 3·1 운동의 빛이 된 기독교인> 기획 특집에서는 3·1 운동 당시 광주지역 유일한 교회였던 북문안 교회와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비롯한 기독교 학교 등 크게 세 축을 중심으로 광주 3·1 만세운동을 5회에 걸쳐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①광주전남 3·1 운동 기폭제 '조선독립광주신문' 계속 |
광주 3·1 운동을 앞두고 서울에서 진행되는 3·1 운동을 살펴보기 위해 3월 2일 서울을 찾은 최흥종은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검거돼 투옥됐다. 최흥종과 함께 서울에 올라갔던 김복현은 3월 5일 최흥종이 검거된 사실을 확인하고 광주로 내려온다. 김복현은 현 광주 남구 양림동 일대에서 광주 3·1 운동을 준비하던 10명과 모임을 갖고 태극기와 유인물 제작, 인력 동원 등에 대해 논의한다. 일제는 3월 10일 진행된 광주 첫 3·1 운동에 강력히 대응했고 이 과정에서 광주 3·1 운동 주동자 상당수가 검거된다.
광주 3·1 운동 과정에서 검거돼 투옥된 이들에 대한 당시 재판 기록 등을 분석한 노성태 광주 국제고 역사 담당 수석교사에 따르면 광주에서 3·1 운동을 준비한 주역들 대부분은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과 2·8 독립선언서 등을 미리부터 접하고 있었다. 황상호 등 광주제중원 직원들은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광주전남지역에서도 3·1 운동의 필요성과 움직임을 널리 알려낼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9절지 크기 2장의 종이로 만들어진 조선독립 광주신문 1호 첫 번째 면에는 앞서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의 내용이 간추려 들어갔다. 두 번째 면에는 3월 10일 광주 3·1 만세운동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됐다. 이밖에 신문에는 고종 독살설, 미국 월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이 포함됐다. 조선독립 광주 신문 1호는 3월 13일 큰 장터 등에서 열린 광주 3·1 운동 2차 집회에서 광주제중원 직원 홍덕주와 장호조에 의해 시민들에게 배포된다.
실제 광주기독병원이 분석한 조선독립 광주신문 1호에는 "3월 10일 만세운동 과정에서 일본 상인들이 양같이 순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붙잡아 때리고 상처를 입혔다", "조선의 봄은 이미 왔으니 우리들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목적을 향해 나갈 뿐이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조선독립 광주신문 중 원본은 1호만 보전되고 있다. 1983년 전남 목포 정명여고 선교사의 사택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조선독립 광주신문은 독립가, 3·1 독립선언문, 2·8 독립선언문 등과 함께 발견됐다. 조선독립 광주신문 발행인 란에는 황상호의 가명인 '황송우'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선독립 광주신문이 목포 정명여고에서 발견된 사실은 신문이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지역에도 전해졌으며 광주전남 만세 운동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광주지역 자체적으로 신문을 발행했다는 점은 다른 지역과의 교류와 별개로 지역 스스로 3·1 운동의 방향과 과제 등을 논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노성태 국제고 수석교사는 "광주 제중원 직원 황상호 등이 제작한 조선독립 광주신문은 항일투쟁의식을 고취하고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는 등 광주전남에서 3·1 운동이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며 "광주에서도 3·1 운동에 대한 준비가 자체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