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검-안재현이 재현한 '캔디'… '역클리셰' 드라마 눈길

재벌 남성-평범한 여성 로맨스 성별 반전시킨 '남자친구'-'뷰티 인사이드'
"여성 대중 타깃… '신데렐라' 클리셰는 떨쳐내기 힘든 코드"
"남녀 역할 바뀌면 새로운 관점 생겨나"

tvN 새 수목드라마 '남자친구'에서 김진혁 역을 맡은 배우 박보검, 지난달 종영한 JTBC 월화드라마 '뷰티 인사이드'에서 류은호 역을 맡은 배우 안재현 (사진=황진환 기자, 이한형 기자/자료사진)
#1. 회식이 끝나고 거나하게 취한 신입사원이 비틀거리며 거리를 맴돈다. 하필 귀가 중이던 그 회사의 대표가 신입사원을 보고 불러세운다. 신입사원은 "대표님! 늦게 퇴근하십니다! 역시 오-너!"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대표는 그에게 과거 자신의 호의를 거절한 것에 뒤끝이 있다며 자기 차에 탈 것을 권한다. 차에 탄 신입사원은 소중히 간직해 온 마른오징어 한 조각을 대표 입안에 넣기 위해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린다.

#2. 자기 생일 때문에 가족 모임이 만들어진 줄 알고 집에 들른 항공사 대표. 하지만 기억해주는 건 아빠뿐. 거기다 모임 참석자에게 좋아하는 상대를 갖고 놀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서러워진 항공사 대표는 상대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와 달라고요. 나 있는 데로"라고 한다. 하지만 상대는 "제가 지금 알바 중이라 지금 당장은…"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상대의 알바 장소에 항공사 대표 직원이 찾아와 대표님이 이 가게 통으로 빌렸다며 가게 장사를 접는다고 말한다. 자신의 재력을 십분 활용한 대표는 그제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

첫 번째는 지난주에 첫선을 보인 tvN 새 수목드라마 '남자친구'의, 두 번째는 지난달 종영한 JTBC 월화드라마 '뷰티 인사이드'의 한 장면이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두 사례 모두 대표는 여성이다. 반면, 갓 입사한 사원과 생계를 위해 일하는 알바생은 남성이다.


재벌 2세 혹은 3세, 최소한 본부장-실장급은 되는 높은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갖추었지만 때로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앞서는 남성. 집안 살림이 평범하거나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최대한 세상을 선의로 바라보려는 여성. 지금까지 숱한 드라마에서 등장한 이런 남성과 이런 여성의 이야기를 우리는 '캔디' 혹은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불러왔다.

사회적 신분과 재력 차이가 큰 남녀가 '진정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다음 장면이 빤히 예상될 만큼 전개가 단순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클리셰(판에 박은 듯한 진부한 표현이나 설정) 범벅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tvN '남자친구'와 JTBC '뷰티 인사이드'는 주인공 관계와 이야기 얼개에서 나타나는 클리셰를 옮기되, 성별 반전을 통해 새로움을 꾀한 경우다. 드라마 팬들은 그동안 남녀에게 주어졌던 전형적인 역할(클리셰)을 반대로 적용했다는 뜻에서, 이를 '역(易)클리셰'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남자친구'는 첫 방송부터 tvN 역대 첫 방송 시청률 2위를 기록했고 2회 만에 10%를 넘기며 '역시 송혜교-박보검'이라는 반응을 낳았다. CJ ENM과 닐슨코리아가 공동 개발한 콘텐츠 영향력 측정 모델 CPI 11월 5주 리포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이 발표한 드라마 화제성 3주 1위를 차지한 '뷰티 인사이드'의 메인 커플은 한세계(서현진 분)와 서도재(이민기 분)였지만, '은사'라 불리는 '강사라(이다희 분)와 류은호(안재현 분) 커플을 지지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 돈 많고 능력 있고 적극적인 여성, 밝고 희망적이며 감정 노동하는 남성

'뷰티 인사이드'는 그야말로 역클리셰를 완벽 재현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족 틈에 들어가 눈치 보며 산 과거의 아픔이 있고, 능력을 알아봐 주는 이가 있어 저가 항공사 대표가 되지만 야망에 불타며, 필요할 때 자기의 재력과 권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강사라. 거기다 좋아하는 상대 앞에선 유난히 약해지는 면까지, '까칠하지만 알고 보면 그리 나쁘지는 않은 재벌'이라는 기존 남자주인공 공식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사제가 되려는 류은호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됐을 때, 사라는 신을 찾으며 헌금을 많이 하겠다고 약속한다. 가방을 다 팔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는 은호의 처지를 듣자마자 자기가 다 사겠다며 바로 카드를 내민다. 돈 이외의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본 적이 없는 약점이 다소 코믹하게 표현된 장면이다.

JTBC '뷰티 인사이드' 강사라는 생계를 위해 알바를 하는 류은호를 돕기 위해 자기 재력을 마음껏 쓰는 재벌이었다. 감정 표현에도 솔직한 사라는 은호에게 먼저 청혼하기도 한다. (사진='뷰티 인사이드' 캡처)
'남자친구'의 차수현 역시 오랫동안 단련된 기업가의 마인드로 사람을 대한다. 낯선 땅에서 졸지에 빈털터리가 된 그는 여행객 진혁에게 신세를 질 때마다 '보상'을 말한다. 진혁이 위험한 상황을 맞은 자기를 도와준 것을 모르기에, 자기가 진혁에게 기대있을 때도 도리어 "나한테 용건이 있는 거냐"고 묻는다.

또한 차수현은 국회의원, 서울시장, 당 대표를 거친 정치인 아버지를 두었고, 어른들의 큰 그림 아래 사랑 없이 결혼했다가 이혼한 상태다. 자신을 통제하려는 가족과 갈등하고, 상처로 남은 과거가 있다는 것 역시 남자주인공에게 주로 주어졌던 서사다.

남성 캐릭터들은 재벌 로맨스물의 '캔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출중한 외모로 주변 분위기를 밝게 만든다. '남자친구'의 진혁은 "쓸데없이 잘생겼다"는 말을 상사에게 들을 만큼 사내에서도 인정받는 미모다. 수현은 진혁을 보며 혼잣말로 "청포도 같다"고 읊조린다. 극중 인간 포카리스웨트라는 별명을 지닌 '뷰티 인사이드'의 은호도 만만치 않다. 본인이 맑고 깨끗하며 부드러운 이미지라는 것을 잘 알고, 이를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자기 얼굴 보러 오는 손님을 다수 보유한 인기남이다.

감정 노동을 하고, 폭력적이지 않다는 점도 특징이다. 속내를 털어놓을 데 없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살뜰히 생일 케이크를 챙기며 감정 노동하는 것이 '뷰티 인사이드'에선 남성인 은호의 몫이었다. 같이 커피 마시고, 살사 공연 보고, 인형 뽑기 놀이를 하며, 건조하기만 했던 여성 캐릭터의 삶을 윤기 나게 해 주는 역할을 '남자친구'에선 진혁이 맡는다. 수현의 팔목을 잡아 끌었다가 이내 잘못을 깨닫고 "제가 무례했다"고 사과하는 모습은, 진혁이란 인물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두 사람의 관계에선 여성이 주도권을 쥔다. 신세를 질 때 계속 뭔가를 하자고 한 사람은 수현이었고, 거기에 화답한 것은 진혁이었다. 아마 두 사람에게 닥친 첫 번째 위기가 될 '휴게소 데이트 사진 스캔들' 역시 라면 먹으러 가자는 수현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뷰티 인사이드'에서는 사라가 먼저 은호에게 좋아한다고 말한다. 은호의 집에 찾아가 은호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겠다며 "아드님을 저한테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도 사라다.

◇ 성별 반전 로맨스만의 매력

tvN '남자친구'의 차수현-김진혁은 쿠바에서 우연히 만나 한국에 돌아와서는 동화호텔 대표와 신입사원으로 재회한다. (사진='남자친구' 캡처)
류진희 문화연구자는 "성별 반전 로맨스는 미러링(의도적 모방 행위)에 환호했던 여성 대중을 타깃으로 한다고 본다. '캔디'나 '신데렐라'와 같은 장르적 클리셰는 축적된 관습이면서 쾌락의 코드이기도 해서, 이야기를 만들 때 단번에 떨쳐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류 연구자는 "예를 들어 여성 사장-남성 직원 커플링은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재미를 갖고 가면서도, 자연화된 설정이 사실은 문화적 장치의 일부라는 것을 시청자로 하여금 알게 한다"고 전했다.

이어, "박보검 씨 캐릭터가 이유 없이 청순하고 헌신적으로 나오는 것, 송혜교 씨가 '청포도 같다'고 말하거나 같이 라면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 '아, 그렇구나?' 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패러디 기능을 수행한다"고 부연했다.

오수경 드라마 칼럼니스트는 "남녀 역할이 바뀌면 새로운 관점이 생기는 것 같다. '남자친구'의 경우, 여성이 경영자가 됐을 때 장점을 잘 뽑아냈다. 그동안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남성 본부장, 실장이 나이 많은 임원이나 비서에게 반말하며 권위를 내세우면서 일은 안 한 것에 비해 차수현은 능력 있는 실무형 경영자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오 칼럼니스트는 "친구인 비서에게도 존대할 정도로 정중하고, 직원 가족 생일까지도 챙기는 따뜻한 리더십을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재벌 남성'이 자기 상처나 고독을 타인에 대한 무례나 폭력으로 표출하는데 차수현은 그렇지 않다는 점도 좋다"고 덧붙였다.

능력 있고 성품도 준수한 CEO로 여성을 그리면서, 남성은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존재로 묘사되는 점을 신선함의 한 요인으로 꼽기도 했다. 오 칼럼니스트는 "(극중 남성 캐릭터를) 가난하고 불행한 캔디로 그리지 않는 점, 서로 존중하는 점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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