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부터 촛불…"文정부에 간절히 바란다"

내내 숙연하던 영화관 객석 곳곳 탄식
IMF벼랑 끝 선택…"아무도 믿지 마라"
사회학자 윤인진 "불신 키워온 불안감"
공동체 붕괴…"시멘트 기득권 공고화"
"촛불이 세운 정부, 사명감 되새길 때"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30일 오전 11시쯤 경기 성남시에 있는 한 영화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소용돌이에 휘말린 한국 사회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상영되는 이곳 현장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변해갔다. 극이 절정으로 치닫자 내내 숙연하던 객석 곳곳에서 괴로운 탄식이 터져나왔다. 어둠속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손으로 눈가를 훔치는 관객들도 눈에 들어왔다. 20여년 전 사건을 재현한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여전히 그 극단의 시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각자의 초상을 그리고 있었다.


영화는 외환위기 이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자살률 1위, 실업인구 급증 등 부조리로 점철된 지금 대한민국을 상기시키면서 끝맺는다. 극중 자식에게 "아무도 믿지 말아라" "나 자신만 믿으라"고 당부하는, 당대 벼랑 끝 선택의 기로를 통과해 현재를 사는 가장의 모습은 무너진 공동체의 참상을 웅변한다.

사회심리를 연구하는 사회학자 윤인진(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날 "1997년 외환위기는 이후 한국 사회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꿨고 그러한 양상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며 진단을 이어갔다.

"외환위기 이후 국민들의 불안과 불신은 갈수록 커져 왔고 이는 공동체 의식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개인을 보호하는 국가·사회의 공공성이 갈수록 훼손된 데 따른 것이다. 손해보험이나 사적 연금의 수요 급증과, 이를 오히려 장려해 온 국가 행태는 그 단적인 증거다."

이러한 파편화 흐름은 우리 사회 고질적인 병폐로 지목되는 물질주의·한탕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윤 교수는 "세계 가치관 조사와 같은 국제 비교 조사를 보더라도 한국인들의 물질주의 가치는 여전히 굉장히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며 "마치 신체는 성인이 됐는데 정신은 청소년기에 머무는 상태와 같다"고 설명했다.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윤택해졌을지는 몰라도 물질주의 경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물질주의는 기본적으로 본인이나 가족 등 좁은 테두리에만 초점을 둔다. 이로 인해 공동체나 사회로까지 인식 범위를 넓히지 못하는 것이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지난 2005년부터 5년 단위로 15년에 걸쳐 한국인의 정체성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를 보면 우리네 공동체 의식·참여 정도는 상당히 약화되는 추세로 나타난다."

◇ 분노와 좌절 너머…"촛불로 세운 정부에 더욱 강하게 개혁 요구해야"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공공성을 훼손하고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국가 행태에 끊임없이 저항해 왔다. 이는 결국 지난 촛불혁명으로 폭발했고 급기야 그 힘으로 정권을 바꿔냈다.

윤 교수는 "시민들이 2년 전 촛불을 들고 일어선 이유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경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정권까지 교체했다"며 "이에 따라 현 정부가 적폐청산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 실천이 굉장히 어렵다"고 설명했다.

"한국 사회 기득권 체계는 굉장히 공고하다. 한 예로 사립유치원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를 공공화하는 방향으로 가려 애쓰지만 사립유치원들은 사유권을 주장하기에 급급하다. 여기에 제2야당인 자유한국당과 보수 언론들도 나서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사립유치원 비리가 명백한데도 이것조차 고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는 "그만큼, 심지어 촛불로 세운 정부조차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잘못된 기득권 체계를 바꾸는 일이 어렵다는 이야기"라며 말을 이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국민들의 올바른 인식도 중요하다. 현 정부와 같이 어떠한 책임을 맡은 사람이나 조직을 비판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다. 분노나 좌절을 누군가에게 풀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다. 적폐청산을 내건 정부조차 하기 힘든 일인데, 만약 자유한국당에서 정권을 잡았다면 더욱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현 정부로 하여금 정권 초기에 가졌던 정신을 되새기도록 개혁을 더욱 강하게 요구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 "공고한 기득권 장벽에 틈새…문재인 정부 시대 사명"

윤 교수는 "대개 개혁이 이뤄지지 않고 정체될 경우 대안처럼 절충론·협상론과 같은 타협이 이뤄지기 마련인데, 노무현 대통령 역시 결국 이로 인해 어느 쪽으로부터도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하지 않았나 싶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 나타나는 양상을 보면 자칫 정치적으로 절충하고 타협하는 선에서 머물 우려가 크다. 선거구 개편 후퇴 등에서 나타나듯이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기득권만 지키려는 양태를 보이는 것도 그 예다. 이는 결국 현 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끔 만드는 일이다. 2년 전 초심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실천하려 애써야만 성과가 나올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봉합할 경우 적폐는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의 '20년 집권론'과 같은 말은 불필요하다. 정권을 연장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을 뿐 개혁에 방점을 찍고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며 "정치를 잘하면 국민들 지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 여당 역시 정권을 만들어준 국민들의 정신을 그대로 떠받들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수십년간 시멘트처럼 굳어진 기득권의 공고한 장벽을 완전히 깨기는 힘들더라도 그곳에 틈을 내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본다.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 그렇게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여파가 지지율 하락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결국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더욱 공고해진 기득권 구조를 직시하고 그것과 계속해서 싸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 윤 교수의 지론이다.

"이럴 때일수록 시민사회와 언론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정치권이 국민 여론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민 여론이 분산되고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식으로 가서는 위험하다. 현 정부는 '필사즉생'(必死卽生·반드시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아난다) 각오로 한국 사회를 좀먹고 병들게 만드는 것들에 담대하게 맞서야 한다. 이럴 때만이 국민들 지지를 다시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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