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이처럼 시끄러운 사안에 대해 대법원이 결정을 내리면 대부분 이에 수긍하고 조용히 지는 법인데, 이번은 조금 다른 듯하다.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는 인정된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양심'이 무엇을 말하는 지에 대해서는 애매하고, 더 나아가 이를 판단한 주체나 근거조차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특정 종교와는 상관없는 일반 신념에 대해서도 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의 정당한 사유로 인정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설왕설래가 그치질 않고 있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병역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22)씨에 대한 상고심을 심리 중이다.
해당 사건은 강제징집 제도 자체가 위헌이라는 개인의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사례다. A씨는 "현 징집제도는 모병제라는 대안이 있음에도 이를 채택하지 않고 강제징집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병역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종교를 이유로 든 병역거부와는 다른 점이다.
앞서 1·2심은 모두 유죄를 선고했지만 이번 대법원의 '양심적 병역거부' 판결로 A씨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5일 A씨 사건을 두고 "종교적인 이유에 따른 것이 아닌 '일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도 양심의 자유에 해당할 수 있다"며 "법원이 진정한 양심의 발현으로 판단할 경우 파기환송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심이 진실하다고 판단되면 포괄적인 이유로도 병역을 거부할 수 있다는 취지다.
곧바로 양심의 진실성을 어떻게 따질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정당한 사유' 가 되기 위해선 그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가정환경이나, 성장 과정, 학교생활과 사회 경험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양심을 증명할 수 있는 신뢰 가능한 척도를 만드는 게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심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각각의 자료가 신빙성이 있는지 하나하나 검증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각자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병역을 기피하는 사건들이 법원 문을 두드릴텐데 이중에 거짓 양심이 있는지 검사가 일일이 탄핵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경지검의 한 검사는 "양심이 진실한지 보려면 그 사람 일생에 대한 자료를 봐야하는데 어떻게 신빙성을 따질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폭력적인 게임을 하는지 이런 것들까지 하나하나 법정에서 다퉈야 하는 건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더해 "어렸을 때부터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스펙'을 만든 사람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겠느냐"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대법원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하급심에서 올라오는 분쟁을 최종적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조계에선 최근 대법원 판결은 오히려 논란을 생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6월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를 마련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이 헌법에 불합치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병역 거부자들에 대해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일종의 '법적공백'이 발생한 상황이다.
병무청은 일단 직권을 통해 병역 거부자에 대해 일시적인 병역 연기 조치를 하며 급한 불은 끈 상태다.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판결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30일 대법원은 일제 강제징용 재판에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했지만, 청구권의 소멸시효 시점은 명확히 판단하지 않아 혼란을 야기했다.
최근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대법원이 하급심에 자체에 대대한 법률적 판단을 넘어 판단 자체에 사회적인 의미를 담으려 하는 것 같다"며 조심스런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