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KBO 총재는 23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일반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날 문체위 국감은 대한체육회, 국민체육진흥공단 등 5개 체육 단체에 대해 이뤄졌다.
KBO는 국감 대상에서 빠졌지만 국민적 관심이 쏠린 이슈에 손혜원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증인으로 정 총재를 불렀다. 이미 지난 10일 손 의원은 선동열 야구 대표팀 감독을 불러 논란의 아시안게임 선수 선발을 질타하다 여론의 거센 역풍을 맞은 바 있다.
손 의원은 이날 정 총재에게 질문하기에 앞서 "앞서 선 감독의 증인 출석 때는 논란도 있었고 내가 흥분을 자제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 총재에게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이후 지난 9월12일 기자회견 때 어떤 내용을 사과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정 총재는 "선수 선발 과정에서 국민 정서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데 대해 사과했다"고 답했다. 이어 "선발은 원칙적으로 감독 고유 권한"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그럼에도 선수 선발 과정에서 여론이 비판했다는 걸 알리고 참고하라고 얘기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고 덧붙였다.
논란이 된 것은 오지환(LG), 박해민(삼성) 등 입대 시기를 늦추면서까지 아시안게임 금메달 병역 혜택을 노린 일부 선수들이다. 확실한 주전이 아닌 이들을 뽑은 게 군 면제를 도와준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진상을 밝혀달라는 청와대 국민 청원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에 정 총재는 "병역 면제와 관련해서 의혹을 받았고 선발 과정에서 반드시 성적 순으로 됐나 논란이 있었다"면서 "사과는 했지만 선수 선발은 감독이 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당시 국민 정서를 보면 전체가 분노를 했다"면서 "분노한 국민들을 다독거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사과를 했다"고 설명했다.
정 총재의 자가당착은 이어졌다. 이런 선수 선발 논란을 빚은 선 감독 체제로 가면 2020년 도쿄올림픽에 대한 우려가 있다는 질문에 정 총재는 "선 감독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반성할 걸로 믿고 있다"면서 "우리(KBO)가 아시안게임 지원은 했지만 선발은 감독이 하는 게 맞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정 총재는 전임 감독제에 대해 "찬성은 하지 않는다"면서 "전임 감독제는 국제대회가 자주 있지 않거나 상비군이 없다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선 감독은 현재 전임 사령탑이다. 이런 가운데 KBO 총재의 전임 감독제 불필요 발언은 압박을 줄 수 있는 '불필요한' 발언이다.
선 감독에 대한 정 총재의 불편한 발언은 이어졌다. 손 의원은 "앞선 국감에서 선 감독이 집에서 TV로 선수 분석을 한다고 답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정 총재는 "선 감독의 불찰이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야구장을 가지 않고 선수를 보려고 하는 것은 마치 경제학자가 현장에 가지 않고 경제 지표만 갖고 분석하고 대응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잘못이라는 의미의 불찰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물론 대표팀 감독이 집에서 TV로 선수를 살핀다는 것이 일반 국민의 시각에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팬들이라면 야구장에서 관전하는 것도 좋지만 보다 종목의 특성상 정밀하게 기량을 살피려면 중계를 보는 게 더 낫다는 점을 알고 있다. 평소 야구광이라고 자부하는 정 총재가 간과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전임 감독제 불필요 발언도 그동안 야구계의 속사정을 몰랐던 것처럼 보인다. 전임 감독제는 야구계의 숙원이었다. 그동안 대표팀 지휘봉은 주로 KBO 리그 우승팀 감독이 맡았다. 그러나 2007년에는 우승팀이 아닌 두산 김경문 당시 감독이 사령탑에 올랐고,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도 야인이던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이 맡았다. 우승팀 감독이라도 대표팀 사령탑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표팀 차출 공백이 소속팀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경문 감독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승 금메달 신화를 이뤘지만 그해 한국시리즈(KS)에서 아쉬운 준우승을 거뒀다. 김인식 감독도 WBC 준우승의 업적을 이뤘으나 한화는 가을야구에 실패, 사퇴해야 했다. 때문에 야구계에서는 소속팀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전임 감독제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선 감독이 지난해 7월 부임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KBO 총재가 전임 감독제가 불필요하다고 언급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물론 전임 감독제는 전임 구본능 총재 당시 결정된 사안이다. 정 총재로서는 전 총재 시절의 결정이 마뜩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뤄진 전임 감독제의 임기가 채워지기도 전에 불필요하다는 발언은 그야말로 불필요한 것이었다.
물론 조 감독은 KBO 리그의 대표적 명장이다. 2000년대 후반 SK 왕조의 기틀을 닦았고, 2009년 KIA의 통합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전임 감독제 불필요 발언과 손 의원의 선 감독 사퇴 발언 이후 언급되기에는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 질문 내용과 답변이 사전에 조율된 듯한 인상을 주는 대목이었다.
선 감독이 애매한 상황에서 논란의 중심에 선 선수들을 뽑은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를 지켜만 보고 있다가 뒤늦게 부랴부랴 사과한 KBO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대표팀 감독을 선임하고 선수 선발의 전권을 준 게 KBO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더 큰 책임이 KBO에 있을 수 있다.
선 감독은 지난 국감에서 "지금까지 유니폼을 입고 운동만 해와서 행정과 사회적인 것은 진짜 몰랐다"며 사과했다. 물론 선수와 감독으로 프로 정상에 섰던 선 감독이 국민 여론을 몰랐다는 것도 잘못이나 스포츠인으로서 외길을 달려온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 총재는 정치인 출신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정 총재는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거물이다. 누구보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자리에 있던 정 총재가 선수 선발과 관련해 팬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의 반감을 몰랐다면 이는 자신의 경력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날 정 총재는 선 감독에 대해 반성과 불찰이라는 표현을 썼다. 잘못과 관련이 있는 말들이다. 자신과 KBO에 대해서는 쓰지 않은 말들이다. 여기에 정 총재는 "분노한 국민들을 다독거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사과의 배경을 설명했다. 듣기에 따라서 살짝 거북한 표현일 수 있다.
정 총재는 이날 자신의 야구관을 나름 소신있게 펼쳤다. 경제학자 출신답게 동반 성장과 경제학의 유치산업보호 등을 언급하며 야구계의 발전 방향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야구 대표팀에서 튄 불똥이 다른 종목과 분야까지 미친 데 대한 사과하는 마음도 드러냈다.
하지만 선수 선발 논란, 대표팀 감독과 관련된 발언은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야구광으로서 KBO 총재까지 오른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동안 야구계의 흐름과 팬들의 인식을 감지하지 못한 가운데 나온 모순된 발언이 적잖았다. 여기에 선수 선발 논란과 관련해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은 KBO 총재이자 야구인 정운찬이 아닌 노회한 정치인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