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아직 해 보지 않은 역할과 작품이 있다. 최소한 한 번은 의사 가운을 걸쳐봤을 것 같은데, 해 본 적이 없단다. 납치당한 딸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평범한 아버지의 '생활 액션'을 담은 영화 '테이큰'의 여자 버전은 어떨까 상상한다고도 했다.
열 손가락을 서너 번은 접었다 펴야 할 만큼 작품 수가 많은데도, 채시라는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때 눈빛이 특히 반짝였다.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채시라는, 기회가 닿으면 얼마든지 새 작품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세 작품이 3년에 한 편꼴로 나오는 탓에 다음 작품도 3년 뒤에 볼 수 있냐는 짓궂은 질문에 그는 "설마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노컷 인터뷰 ① '이별이 떠났다' 채시라 "진짜 작업다운 작업을 해 본 것 같다")
◇ '채시라 덕후' 김민식 PD가 있어 더 행복했던 현장
'이별이 떠났다'는 채시라의 복귀작인 동시에, 김민식 PD가 8년 만에 메인 연출을 맡은 작품이기도 했다. 여러 인터뷰에서 '다시는 드라마를 못 찍을 줄 알았다'고 고백했던 김 PD에게도 뜻깊은 기회였다. 더구나 고등학생 시절부터 팬이었던 채시라와 처음 만난다는 개인적 의미도 있었다.
지난 5월 열린 '이별이 떠났다' 제작발표회에서 김 PD는 "저는 채시라 씨 때문에 (이 작품에) 왔다"면서 "(이번 드라마를 찍으며) 약간 덕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취미생활을 열심히 즐기는데 회사에서 월급까지 주네? 밥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성과를 내야 할 것 같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낸 바 있다.
팬을 자처한 김 PD와 함께한 소감을 묻자 채시라는 "인스타에 '팬질하려고 위장 취업했다'는 사진 올라온 걸 봤다. 너무 재밌는 분"이라며 웃었다.
"특별하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기보다 원래 배우를 존중하고 믿어주시는 분이세요. 역할을 배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고, 저한테는 더 큰 믿음을 주셨던 것 같아요. 스태프들이 그러는데, 모니터 보는 (감독님) 눈이 항상 하트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저 많은 걸(대사를) 외웠을까, 정말 신기하다'라고도 하셨다고 하고요. 정말 다 좋게 보신 것 같아요. (웃음)
말도 참 잘하시고. 다시는 연출을 못할 줄 알았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감독님이) 오히려 더 영희같이 느껴졌어요.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보면 칼을 간다는 느낌 있잖아요. 마음으론 포기했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낼 거야, 하는 걸 갖고 있지 않으셨을까요. 감독님은 각자 분야에 있는 분들(배우, 스태프)에게도 모두 의견을 들었어요. 다 아우르면서 함께 끌고 가시더라고요. 잘 모르는 것 같으면 인정하고 묻기도 하면서, (분위기를) 잘 가꿔나가지 않았나 싶어요.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아 너무 행복한 곳이었어요."
채시라는 "평상시에 어떤 작품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머리를) 길러놓는 스타일이다. 3년 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긴 머리 상태로 출발하는 게 좋다고 봤다. 처음부터 이 머리(단발)였다면 몰라도, (긴 머리에서 시작해서) 임팩트가 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잘해보고 싶은 엄마' 채시라, 아들과 진지한 대화 나눈 사연
'이별이 떠났다'에서 채시라가 맡은 서영희는 남편과 아들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상황이었다. 감정 소모도 크고, 상당히 가라앉아 있는 우울한 캐릭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작품에만 집중해야 했다.
채시라는 "아이들을 좀 멀리했다. 그래그래 하고 받아주다가는 제 것(연기)을 못 할 것 같아서.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대중과의 약속이니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고 고백했다.
대본 외워야 하니까 엄마를 혼자 두라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평소에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해소가 되지 않으니 아이들이 잠시 삐죽거린 적도 있다고. 채시라는 "신경을 아주 많이 끊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작품은 너무 밀도 있었기 때문에"라며 "이제 유종의 미를 거뒀으니 아이의 구멍 난 부분을 메워줘야 한다"고 전했다.
"어떻게 하면 엄마 노릇에 최선을 다할지 고민해요. 제가 잘 가는 건지, 못 가는 건지 모르지만 일단 후회하고 싶진 않아요. 나중에 가서 '그때 그렇게 할걸' 하기 싫어요. 그냥, '잘해보고 싶은 엄마'예요."
◇ 전작하고는 반대되는 캐릭터 하고파
채시라는 이미 충분히 많은 작품을 해 온 배우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작품과 다음 작품 사이가 조금 길어진 편이다. '투명인간 최장수'(2006)에서 '천추태후'(2009)까지가 3년이었고, 그다음 '인수대비'(2011)까진 2년이 걸렸다. 곧바로 '다섯손가락'(2012)에 출연했으나 '착하지 않은 여자들'(2015)까지 3년, 거기서 이번 '이별이 떠났다'(2018)까지 또 3년이 걸렸다.
혹시 다음 작품도 3년 후에 볼 수 있냐고 물으니 채시라는 "설마요"라며 웃었다. 그는 "팬들도 기자님들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 이성재 씨도 '누나, 1년에 한 편씩은 하시죠?' 했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 1년에 한 편은 하고 싶다"고 밝혔다. 남편인 김태욱은 "무슨 소리냐, 1년에 두 편! 더 하라"고 했단다.
하지만 그동안 줄곧 쉬기만 한 것은 아니다. 1998년부터 시작한 사랑의 열매 홍보대사로 활동했고, 지난해에는 제4회 가톨릭영화제 홍보대사로도 제 몫을 다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야외에서 펼친 오페라 공연 '동백꽃 아가씨'다. 그는 여성 변사 역을 맡았다.
"국립 오페라단에서 6천~7천 석 규모로 서울에서 이틀 공연했어요. 좀 더 드레스처럼 만들어진 한복을 입어서 굉장히 매력적인 느낌이었어요. 나중엔 강원도 강릉에 가서도 공연을 했고요. 오페라 공연이 배우로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합창단, 무용단, 오페라 가수, 배우 이렇게 콜라보레이션했는데, 웅장한 무대에서 야외에서 라이브로 공연하는 건 멋진 경험이었어요."
경력 30년을 훌쩍 넘긴 그였지만, 여전히 새로운 것, 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채시라는 "영화도 좀 하라는 얘기를 부쩍 많이 들었다. 제작진도 그런 말 많이 하셨고. 우선 좋은 작품을 마쳤으니 내년에도 또 하고 싶다, 드라마도"라고 밝혔다.
이어, "여자판 '테이큰' 같이 액션 연기도 하고 싶다. 형사 이런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하는 생활 액션과 복수? 또 '화양연화' 장만옥 같은 역할도 하고 싶다. 남녀의 심리를 파고든 멜로도 괜찮을 것 같다. 엄마 역할 아닌 작품들도"라고 전했다.
"연륜은 돈 주고도 못 사고,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경험은 큰 재산이고, 또 한 해 한 해 제가 점점 익어간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작품을 자주 하는 건 아니지만, 끌리는 작품을 만났을 때 제가 가지고 있고 익어온 것들을 끄집어내서 보여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위안받고, 행복도 느끼고, 감동하고 치유도 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제겐 행복한 일이예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