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 자신을 본 적이 있어?"
스무살에 연극 무대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이성민에게 화두를 던진 물음이었다.
지난 9일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당시 처음 연기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던진 질문"이라며 말을 이었다.
"그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는 '자신을 본 적이 있냐고? 거울로 맨날 보는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자꾸 생각할수록 모르겠는 거예요. 그러다가 '나는 진짜 나를 한 번도 못 봤구나'라는 데로 생각이 이어지더군요. 배우는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믿음이 생긴 계기였죠."
이성민은 "연기를 하다 보면 내가 모르는 나를 누군가 알려 주기도 하는데, 매번 스스로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고 회상했다.
"그 한계 안에서 크게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변주해 가는 거죠. 예를 들면, 어떤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색다르게 해낼 수 있지?'라는 자극을 받기도 하지만, 나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섣부르게 달려들지 않습니다. 비범한 역할도 평범하게 접근하려 애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그가 작품을 대하는 자세 역시 이러한 삶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젊은 시절에는 겁나는 게 없었어요. 앞으로 나가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나이가 들면서 연기는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배우의 연기가 재료라면 그 재료를 이리저리 변주해 결과물로 내놓는 것은 감독, 스태프들이잖아요. 매번 함께 작업하는 이들에게 고마울 뿐이죠."
◇ "관객들에게 감정 강요 않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목격자'는 스릴러 장르인데, 개봉을 앞두고 '내가 그동안 이 장르를 안 해 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개인적으로 스릴러·호러 장르를 선호하지 않아요. 보는 게 무섭기도 하거니와, 스스로 이러한 장르에 맞는 배우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그는 "보통 작품을 고르고 캐릭터를 선택할 때 나와 맞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목격자'의 경우 장르보다는 그 캐릭터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를 스릴러에 맞는 배우로 보고 선택한 제작진을 통해 색다른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 같아 반가웠다"고 했다.
이 영화에서 상훈은 아내와 딸을 둔 평범한 가장으로서,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위협하는 범인과, 사건을 해결하려는 경찰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캐릭터다.
이성민은 "준비 과정에서 감독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부분은 (상훈이 경찰에 목격 사실을) 신고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지점들이었다"며 "관객들이 집중력을 잃어 버리는 순간 영화를 끌고 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는 사이 관객들이 '왜 신고를 안 하지?'라는 물음을 갖는 순간 실패한 것이라고 봤거든요. 논리적이든 정서적이든 감정적이든 직관적이든 그 부분에 가장 신경쓰면서 내 역할을 가져가려 했습니다."
'목격자'에서는 이성민의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장면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그의 표정이 긴장감을 쌓아가는 최고의 장치라고 봐도 무방하다. 정작 이성민은 "(촬영 때는) 클로즈업이 그렇게 많은지도 몰랐다"고 전했다.
"카메라가 가까이 와 있으면 '크게 찍는구나'라고만 생각했죠. (웃음) 상황이 명확한 영화인 만큼 굳이 (클로즈업 등을) 의식하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연기에 충실하려 애썼습니다.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봤어요. 그러다 보면 관객들이 지칠 테니까요. 관객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 강약 조절을 해야 한다고 여긴 이유죠."
◇ "누군가와 함께 작업한다는 건 배우의 숙명…늘 감사한다"
"초반에 (긴장감을 조여만 가는 상황이) '너무 고구마처럼 답답하지 않을까' 늘 걱정이었어요. 관객들이 보다가 지쳐서 나가면 어쩌지라는…. 그래서 감독이 '후반은 달리면서 쾌감을 주자'고 생각한 것 같아요. 상업영화적인 코드인 셈이죠."
다만, 연기하는 데 있어서 그에게 '만약 나라면'이라는 직접적인 감정이입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 속 상황을 실제 나와 가족에게까지 대입할 필요는 없었어요. 영화적으로 구성된 상황을 내 가족에게 대입시킨다고 (연기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다고 본 거죠. 일반적인 선에서, 상식적인 선에서 납득할 수 있는 극중 상황이니까요. 이는 내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라, 제작진과 함께 토의해 관객 심리 등을 예상한 데 따른 조치였죠."
그는 "결국 공감을 통한 관객의 집중력을 끌어내는 것이 관건이었다"며 "다양한 연령대, 성별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흐름을 택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알다시피 올여름 극장가에서 이성민은 '목격자'에 앞서 8일 개봉한 '공작'에도 출연해 전혀 다른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 큰 제작비를 들인 영화에 주조연으로 출연하는 그의 모습은 이제 익숙한 일이 됐다.
"체력도 약해지고 기력도 떨어지는 와중에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이런 역할을 언제까지 맡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고민이죠. 그래서 다작에 대한 부담은 없습니다. 직업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오히려 기회가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 더 불안한 거죠."
이성민은 "누군가와 함께 작업한다는 것은 배우의 숙명 같다"며 "가끔식 나를 다르게 변주해 주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고 전했다.
"그러한 작품과 감독을 만나면 감사하죠. 늘 그런 기회가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 과정이 불편하고 고통스로울 때도 있지만, 다르게 변주된 나를 결과물로 만나면 감사한 마음이 들더군요. (웃음) 지난 삶을 돌아봤을 때 '내가 뭘 잘했나'를 보면 주변에서 나를 다르게 변주해 준 사람들을 만났다는 겁니다."
그는 "여러 절묘한 우연과 인연이 맞아떨어져서 지금까지 온 나, 그것이 진리인 것 같다"며 "주변 사람들을 통해 나를 발견해 가는 것이 배우의 일생이지 않을까 싶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