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연예인 수지의 사형을 청원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양예원 사건과 전혀 관계 없는 사진 스튜디오가 수지의 섣부른 행동으로 여론몰이의 희생양이 돼 폐업 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 글은 현재 삭제된 상태다.
이튿날인 19일 수지는 SNS를 통해 "제가 얼마 전 동의 표시를 한 청와대 청원 글 속 스튜디오의 상호와 주인이 변경되어 이번 사건과 무관한 분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략)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이라도 이런 부분들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것은 분명 저의 불찰"이라며 "그래도 이 일과는 별개로 이번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분들의 마음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앞서 수지는 지난 17일 SNS에, 유튜버 양예원씨가 과거 피팅 모델 스튜디오 아르바이트로 입은 성폭력 수사를 촉구하는 국민청원 글에 동의한 사실을 밝히며 "용기 있는 고백에 힘을 보태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회학자 신경아(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21일 CBS노컷뉴스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수지씨를 향한 공격은 인간에 대한 폭력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거대한 폭력"이라고 잘라 말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성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 사실을 말하기가 참 어렵다. 수지씨를 향한 공격처럼 본질과 동떨어진 폭력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권위에서 연예계·운동계 내 성폭력을 몇 차례 들여다봤는데, 조사가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위험을 여성 연예인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수지씨는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을 한 것이다."
미학자 진중권(동양대) 교수는 최근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조그만 전두환·노태우"라는 표현을 썼다. "이게 미시권력이다. 이 사람들(조그만 전두환·노태우)이 저 사람들(전두환·노태우)을 지지하기 때문에 권력이 유지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 교수는 "'내 안의 폭력성' '내 안의 파시즘'이라는 개념이 한동안 회자됐는데, 우리가 일상에서 저지를 수 있는 폭력을 경계해야 한다"며 진단을 이어갔다.
"이러한 일상의 폭력성을 성찰하고 혐오·폭력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따르지 않으려는 결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약 주변에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폭력을 가하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헌법이 보장한 사상의 자유를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비민주적인 시대 겪어 오면서 우리 안에 내면화된 분노 직시해야"
그간 페미니즘,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여성 유명인들이 공격받는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봐 왔다. 이는 "커다란 사회적 효과를 차단하기 위한 공격"이라는 것이 신 교수의 분석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효과를 가져온다. 이번 경우도 해당 스튜디오가 겪어야 할 피해보다도 수지씨의 지적 자체를 불편해 하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지점이 있다. 여성과 남성을 떠나 누구나 폭력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상황에서는 피해자들이 말할 수 있어야 하고, 피해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상관 없다"며 "'미투운동'의 첫 번째 목적은 '오디언스'(audience), 즉 듣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피해자들 목소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지현 검사의 말이 정확하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것이다. (유튜버) 양예원씨도 마찬가지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를 폭력적으로 공격하기 전에,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 먼저다."
신 교수는 "타인이 지닌 사상에 대해, 그것이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수 있는 사상이라면, 그것을 공격하는 행위는 대단히 위험하다"며 "이러한 문제를 남성과 여성 등으로 가르고 서로 대립하도록 만들려는 시도에 우리는 함께 저항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투운동'에서 피해자 대다수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앞장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몇몇 기관을 조사해 보면 군대처럼 남성이 남성을 괴롭히는 경우도 상당하다. 피해자를 여성화시켜서 공격하는 젠더 폭력이 일상화된 셈이다. 노인·아동에 대한 공격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닌 '폭력 불감증'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이러한 폭력성은 비민주적인 시대를 겪어 오면서 우리 안에 내면화된 분노"라는 것이 신 교수의 진단이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촛불 이후'를 걷고 있다. 촛불혁명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은 제도적인 문주주의를 더욱 진척시키는 것뿐 아니라, '일상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까지도 포함한다. 우리 삶에서 민주성을 더욱 심화시켜 나가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는 "우리는 이미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다. 타인에 대한 과도한 폭력, 다른 사람의 사상에 대한 공격을 자제해야 하는 이유"라며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본인이 성찰하고 부끄러워하는 한편 옆에서도 그것을 중단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는 각성한 공동체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며 "'우리가 어떠한 공동체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봤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