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색깔로
날 물들여줘 더 진하게 강렬하게~"
걸그룹 레드벨벳의 '빨간 맛'이 평양 한복판에서, 그것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보는 앞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검정색 핫팬츠에 귀여운 율동, 귀에 익숙하지 않은 멜로디와 직설적인 가사를 평양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공연팀은 다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3년 방북해 공연을 펼친 경험이 있는 그룹 '신화'가 "파워풀한 댄스곡을 선보였는데 관객들이 아무런 호응을 하지 않고 눈에서 레이저를 쏘았다"고 말한 인터뷰가 전해지면서 더 그랬습니다.
특히 북한은 사전 협의때 가사나 율동을 수정해달라는 요구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우리 출연진마다 안내원들을 다 붙여주면서 컨디션까지 세심하게 챙겼다고 합니다.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마치 매니저 같았다"는 뒷얘기도 나왔습니다.
또 남북한 출연진들이 너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어서 "연애하냐"는 농담까지 오갔습니다.
평양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핸드폰을 빌려달라는 요구도 쉽게 받아들여졌고, 평양 시내와 주민들의 모습도 큰 제약없이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천안함 사건을 주동한 것으로 지목되는 등 대표적인 강경파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은 김정은 위원장의 공연 관람을 취재하지 못한 남측 기자들을 찾아와 '경호 라인과 혼선이 있었다'며 너무 과도하게 제한했다고 직접 사과까지 했습니다.
합동 공연 말미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종환 문체부 장관 등과 맞잡은 손을 높이 올리면서 '다시 만납시다’를 같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초 박춘남 문화상이 비공개로 주재하려했던 우리 예술단 환송만찬도 김영철 통전부장이 주재하면서 취재가 가능하도록 변경됐습니다.
북한의 장마당에서 한국 가수 노래나 드라마가 USB에 담겨 몰래 유통되고, 적발되면 처벌을 받는다는 보도들을 접했던 터라 북한의 이같은 유연한 변화에 혼란스러워 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뿐 아니라 노동신문을 본 북한 주민들도 혼란스러워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날라리풍 자본주의 문화'라며 배격해온 남한 대중가수들과 최고지도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 노동신문에 나왔으니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같은 날짜 노동신문 6면에는 "자본주의 문학예술도 근로대중을 노예화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설, 영화, 음악, 무용, 미술 등은 모두 썩어빠진 부르죠아 생활양식을 유포시켜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들고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해독적인 작용을 한다"는 해설 기사가 함께 보도됐습니다.
노동신문 편집자들도 당혹해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면에는 남한가수들 공연 내용과 사진을, 6면에는 자본주의 음악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어야 했으니까요.
북한의 이같은 유연하게 달라진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핵을 포기하고 화해와 협력, 개혁·개방의 장으로 나오려는 진정한 변화일지, 아니면 정상회담을 앞두고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매드 맨(mad men)'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어필하려는 일시적인 전략일지, 김정은 위원장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어 혼란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판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7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과 이어지는 북-미 정상회담에 김정은 위원장이 어떤 태도로 임하는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노림수가 있는 '위장 평화'이자 '미소 외교'에 불과하다며 방심은 금물이라는 보수 진영의 판단이 맞을지, 남북 간 평화협력을 기원하고 화해협력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정부의 평가가 현실로 나타날지, 지금은 북한이 보여주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차분하게 지켜볼 때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