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2만여 곳의 횡단보도가 심야시간대에 차량 신호등을 깜빡거리는 점멸등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서행하거나 일단 멈추는 게 잘 지켜지지 않아 사고는 반복되고 있다.
◇ 7차선 도로서 점멸등 횡단보도 건너다 사망 사고
지난 20일 새벽 4시 30분쯤 서울 강동구의 한 왕복 7차선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새벽기도를 가던 김모(77) 할머니는 횡단보도 건너편 교회 승합차를 타러 가던 중 승용차에 치여 변을 당했다.
당시 신호등은 황색 점멸등이었다. 노랗게 깜빡이는 신호는 '주의하며 서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운전자가 속도를 줄이지 않았던 것으로 경찰은 의심하고 있다.
목격자 송모(24) 씨는 "차가 60~70km/h 정도의 속도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그대로 치고 갔다"며 "정상신호였으면 이런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동경찰서는 횡단보도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 혐의로 전모(70) 씨를 불구속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고 30일 밝혔다.
◇ 3년 동안 548명 목숨 앗아간 '죽음의 점멸등'
점멸신호등은 심야시간(오후 11시~오전 6시) 신호 대기시간을 줄이고 차랑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2009년 7월 도입됐다.
황색 점멸등은 서행하면서 좌우를 확인하고 주의하며 통행하라는 뜻, 적색 점멸등은 정지선이나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정지 한 뒤 주의하면서 진행하라는 의미다.
현재 전국에 2만 2750개가 설치돼 있는데 점멸신호등으로 인한 사고는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전체 점멸신호 교통사고는 지난 2015년부터 3년간 모두 2만여 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모두 54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반 시민들은 점멸신호등이 설치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강동구에 사는 주민 A(64) 씨는 "고속도로도 아닌데 새벽엔 차들이 쌩쌩 달린다"며 "나이 든 사람들은 뛸 수도 없다"고 불안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지모(48) 씨는 "우리나라 신호는 보행자보단 차량 위주"라고 꼬집었고, 박모(25) 씨는 "새벽이라서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더라도 신호는 항상 켜져 있어야 하지 않냐"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점멸신호등이 보행자 안전을 위협한다고 지적했다.
한국교통연구원의 한상진 박사는 "해외에서 점멸등은 많이 쓰지 않는 방식"이라며 "우리가 사람보다 차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 사고와 연결될 위험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수범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점멸로 운영하는 것은 신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점멸신호등을 운영해야 한다면 반드시 보행자 감지 시스템이나 보행자 작동 신호기 등 보조 장치를 설치해 횡단보도를 건널 때만이라도 정상 신호를 운영해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점멸신호등이 운영되고 있더라도 보행자를 자동으로 감지하거나 보행자가 직접 신호등 기둥에 달린 버튼을 눌러 정상신호로 잠시 바뀌는 방법도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교통량과 보행자가 많지 않아 위험성 없는 도로에 한해서 점멸신호등을 쓰고 있지만 사고 발생률이 높다는 지적이 있어 도로교통공단에 연구 용역을 실시했다. 연말까지 효율적인 점멸신호등 운영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