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장자연씨는 지난 2006년 CF모델로 연예계에 데뷔, KBS2TV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연기활동을 하던 중 2009년 3월 7일 자택에서 자살해 숨진 채 발견됐다.
장씨는 유서를 통해 성상납을 강요받고 폭력에 시달리면서 연예기획사, 대기업·금융업 종사자, 언론사 관계자 등 31명에게 100여차례의 접대와 성상납을 했다고 폭로했다.
성상납으로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소속과 직함도 구체적으로 밝혔다.
여기에는 거대 언론사 사주 등 유력인사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져 '미투'(me too)를 한 셈이다.
그렇지만 문건에 오른 유력인사들 가운데 지금까지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법정에 서는 일도 없었다.
경찰은 "술자리 접대를 받은 사실은 확인했으나 범죄 관련성이 확실하지 않아 내사종결하기로 했다"며 오히려 면죄부를 줬다.
이들은 고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신상에 아무런 변동없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상에서 버젓이 활보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장자연 사건을 재조명하려는 물결이 일고 있다.
지난 1월 여성단체 148곳은 '장자연리스트' 재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거찰이 왜 무혐의 처분했는지 철저히 재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고 장자연의 한맺힌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이 지난달 26일 올라와 추천이 8일까지 24,000명을 넘어섰다.
9년 전의 장자연 사건을 이제와서 재수사한다고 해서 그동안 감춰졌던 '죽음의 진실'이 광명 아래 드러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검찰 과거사위원회도 올해 초 대검찰청 개혁위원회가 장씨 사건을 재수사대상으로 삼아달라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1차 사전 조사대상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재수사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사건을 재조명하면서 제2의 장자연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성폭력 근절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만약 9년 전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인 관심이 크게 일었다면 숱한 힘없는 여성들이 그동안 성폭력과 성추행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인의 죽음은 가십거리로 전락해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잘 나가는 유명 연출가와 배우의, 입에 올리기에도 추악한 성폭행과 성추행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번 미투 직전까지 계속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여성이 인격이 무너져내리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피눈물을 흘렸을까.
그들은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는 글을 남기고 죽음을 택한 고 장자연씨와 같은 심경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면서 미투의 대열에 동참했으리라.
장자연 사건이 제대로 경종을 울렸더라면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에서 하루 아침에 성폭력 범죄자로 수사를 받고 수감자의 신분으로 바뀌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날은 여성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철폐, 여성빈곤 타파가 여성운동의 주된 관심사였지만 올해는 달라졌다.
미투운동에 대한 지지와 함께 성폭력 근절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여성운동이 미투운동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미투운동의 파급력은 크다.
이번에야 말로 미투운동이 제2의 촛불혁명이 되어 모든 여성이 성노리개가 아닌,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받도록 인식과 문화, 제도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이뤄졌으면 한다.
제2의 장자연 사건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