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흥부전' 속에 담겨 있던 풍자와 해학도 영화 속에서 더 두드러졌다. 늘 높으신 나으리들의 착취 대상이 됐던 힘없는 민중이 '백성도 하늘 되는 세상'을 꿈꾼다는 요소도 있다. 분노한 민중이 절호의 기회를 얻어 횃불을 들고 궁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불과 2년도 되지 않은 한국사회의 과거를 보여주는 듯하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정진영은 '흥부'를 '정치적 메시지 있는 영화'로만 읽는 것을 경계했다. 더 보편적인 주제에 집중했다는 점, 쉽게 영화를 따라갈 수 있다는 점을 더 주목하길 바랐다.
다음은 일문일답.
▶ 영화는 어제 처음 보셨나. 어떻게 보셨나. (* 인터뷰 전날인 2월 5일 영화 '흥부'의 언론 배급 시사회가 열렸다)
재밌게 봤다. (웃음) 아직 정리가 안 됐는데… (웃음) '흥부전' 변주해서 만든 새로운 이야기다. 맨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고 우려했던 게 '흥부'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거 다 아는 얘긴데' 하면서 관심이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어제 보니, 우리가 다 아는 주걱으로 뺨 때리기, 제비 등이 아주 설득력 있게 배치돼서 아주 잘 편집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떻게 작품에 참여하게 된 건가.
제작자가 ('흥부'가) 첫 작품인데, '왕의 남자' 때도 그렇고 이준익 감독하고도 계속해 오던 사람이다. 첫 작품을 하면서 저를 (어떤 역을) 시키려고 마음먹었다고 하더라. 조항리 역을 받고 나서, 인상 쓰고 위압적인 인물로 하지 말고 좀 복합적인 인물로 했으면 좋겠다는 톤을 잡고 감독님을 만나 미팅했다. 전형적인 얼굴만 가진 배역이라면 못 느낀다고 했고, (감독도) 그렇게 해 보자고 해서 하게 됐다.
▶ 언론 시사회 때 조항리라는 인물을 우스꽝스럽고 천박하게 표현하려 했다고 밝혔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우리가 흥부 놀부 이야기를 할 때 놀부는 천박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지 않나. 조항리는 놀부의 또 다른 현신이기 때문에 앞뒤가 맞는 변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이 그렇듯 우리 '흥부'도 해학이 깔렸다. 그럼 악인은 마당놀이나 탈 판에서 나오는 것처럼 약간 희화화된 양반의 모습이 맞는다고 봤다.
제가 연기할 때 이 사람들을 참고로 했다는 건 복제하거나 모사했다는 건 아니었다. 이 영화가 묵직한 주제를 갖고 있지만, 사실 정치 풍자가 전면에 서는 영화는 아니라고 본다. 이를테면 메시지가 그 자체인 영화들이 있다. '강철비', '1987', '택시운전사' 등. 그런데 '흥부'는 우리 인류의 보편적인 주제라는 말이다. 힘없고 핍박받는 민중과 그들의 안위에는 전혀 관심 없는 권력가들의 갈등. 고난을 이기고자 하는 민중의 노고…
보편적인 주제인데 우리가 1, 2년 사이에 그걸 (실제로) 경험해 버리니까. (영화에) 광화문 나온 게 언급되던데, 사실 광화문은 그때도 있었다. (웃음) 같은 역사를 곧바로 경험해서 느껴지는 포커싱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본격적인 정치 메시지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흥부전'을 변주한 그 자체가 큰 힘이 되고, 서로 다른 두 형제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구조가 더 재미있는 영화라고 본다. 그런데 그게(정치적인 메시지가) 더 강하게 보이는가 보다. 영화가 세상 얘기를 담을 수밖에 없긴 한데, 우리가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 엉뚱하고 천박한 권력가인 조항리를 보며 전작 '왕의 남자' 연산을 떠올렸다는 관객도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다. 연산은 내면적인 상처가 굉장히 깊은 사람이지만, 조항리는 남에게 상처만 준 사람이다. 그쪽(연산)하고 연관시키지 않았다.
▶ 영화에는 가난한 민중을 교육하고 물심양면으로 돕는 조혁과, 권세를 위해 질주하는 조항리의 모습이 대비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이가 왜 나빠졌는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사를 그려 보았나.
생각 안 했다. 그들(이야기의) 바탕이나 위치는 원작에 다 나와 있다. 그래서 (전사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전사는 오히려 극중 흥부(정우 분)와 놀부(진구 분)에게 있지 않나. 그런 점이 재미있는 것 같다.
▶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직접 나타난 인상적인 대사들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나 대사가 있다면.
마음에 드는 것보다 정말 나쁜 대사를 꼽으라면 (조항리가 말한) '꿈을 꾸는 것도 죄다'라는 것이다. 희망을 갖고 사는 게 죄라니.
거의 다 처음이어서 재밌었다. 다 좋았고. 정우는 원래 열정도 있지만 지금 막 질주하는 배우다. 음란소설 작가에서 글로 세상을 바꾼 작가가 되는 거라서 변화가 필요한데 (캐릭터를 소화하기가) 사실 쉽지 않았는데도 잘했다. 주혁이야 제가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이,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조혁'의 영화다. 조혁의 말이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는데 그게 관객에게 많이 다가갈 것 같다.
(정)해인이도 요즘 대단한 라이징 스타로서 자기 몫을 했고, (김)원해는 베테랑이다. (연기를 잘할 수 있게 감정을) 올려주니까 너무나 좋았다. 일일이 다 언급하기엔 배우들이 참 많았다.
▶ 이번 현장에서 연차 높은 선배였는데 좋은 선배의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편하게 해 줘야 할 것 같다. 연기 조언도 (먼저) 묻지 않으면 잘 안 한다. 배우들이 다 자기 것을 준비해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코멘트하는 순간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안 된다. 오히려 조심한다. 잘했으면 좋다, 잘했다고만 한다. 거꾸로 누가 내게 그런다고 해도 나도 좀 흔들릴 것 같다.
배우는 자기 확신으로 가야 된다. 우리는 동료다. 선후배든 뭐든 각자 자기 역할을 갖고, 자신을 믿고 들어온다. 상대방이 하고 싶은 대로, 가장 편한 상태에서 할 수 있게 (분위기를) 만드는 게 동료로서의 예의가 아닌가 싶고 그러려고 한다. 선후배가 어딨나, 같이 뛰는데.
아역배우에게도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일도 아니고. 내 위주로 생각하거나 잘못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독이 해야 할 일이다.
(노컷 인터뷰 ② 정진영 "연기, 하면 할수록 어려워… '완성'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