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약 100년 전,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애정발표'를 했다
② 영화 '아가씨' 히데코-숙희 옷으로 보는 크로스드레싱
<계속>
조선 후기 세워진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치마저고리를 입는 것은 '강제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학생들의 신념을 보여주기도 한다. 옷 입기는 주어진 범주나 경계를 교란하거나 위반함으로써 전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7일 오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성평등 도서관에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문화사' 2강이 진행됐다. 영화사를 연구하는 이화진 씨는 '기모노를 입은 여인-일제 말기 여배우의 신체성과 에스닉 크로스드레싱'이란 주제를 준비했다.
그는 우선 크로스드레싱의 사례를 살핀 후, 일제강점기 때 식민자-피식민자 사이에서 발견된 에스닉 크로스드레싱에 집중했다. 크로스드레싱이란 성별과 반대로 옷 입는 것을 뜻한다. 에스닉 크로스드레싱은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거리가 먼 문화를 전유하고자 하는 옷 입기 방식이었다.
◇ 기모노 입은 히틀러, 조선옷 입은 쓰다 세츠코
크로스드레싱은 공연문화 쪽에서 굉장히 오래된 관습이었다. 여성이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때, 남성 배우가 여성 역할을 하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었고, 대중적으로도 매우 잘 받아들여졌다.
이화진 씨는 "서구에서도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여배우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며 연기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몸 파는 것과 동일시됐던 시기가 있었다. 남성들이 여성 역을 하는 건 연극적 관습이었다. 따라서 크로스드레싱을 해도 위반이나 교란의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비교적 '안전한' 에스닉 크로스드레싱이었다. 이화진 씨는 "백인이라는 외양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게다가 너무 유명한 인물이라 '다른 옷 입기'가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 일본인으로 오인될 위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히틀러의 기모노 차림도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있었지만,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 여성 쓰다 세츠코의 '조선옷 입기'는 보다 적극적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이화진 씨는 "재조선 일본인이 조선여성에 대한 지도와 계몽을 하고, '조선여성의 언니'로서 모범을 보이겠다는 태도"라며 "타자성을 능동적으로 가져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전략이자, 식민자의 시혜(베푼 은혜)를 과시하는 공적 퍼포먼스"라고 진단했다.
쓰다 세츠코가 본국을 떠나 타지에 있는 처지여서 자신의 고결함, 정숙함을 잃지 않는 것을 의무와 책임이라고 여겨 '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옷을 입었다는 주장이었다. 이화진 씨는 "내가 식민자인데 여러분들(피식민자)의 옷을 입고 있지 않나, 하고 베푸는 것처럼 보여주는 굉장히 공적인 퍼포먼스"라고 평했다.
식민지 시기의 여배우들에게서도 에스닉 크로스드레싱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었다. 만주부터 일본, 할리우드를 거치며 코스모폴리탄적인 삶을 살았던 일본인 야마구치 요시코(이향난, 셜리 야마구치 등의 여러 이름이 있었다)은 여러 가지 옷을 입었다.
반면 '삼천만의 연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조선인 배우 문예봉은 조선, 한국, 민족 등을 대표하는 이미지로써 활용됐다. 그래서 기모노 입은 모습의 효과가 더 컸다. 이화진 씨는 "조선옷과 일본옷을 바꿔 입었다는 건 식민지적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상승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고 부연했다.
배우 故 장진영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청연'(2005)의 실제 주인공인 파일럿 박경원은 아예 남성처럼 옷을 입고 다녔다. 바지 차림에 넥타이까지 맨 모습이었다.
이어, "식민지 촌구석의 여성이 비행사가 되고자 일본에 갔다. 여성이라는 것, 식민지 출신이라는 걸 감추는 게 더 편하지 않았겠나. 두 가지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이 있었다. 경계를 위반한, 전복성이 강한 이미지의 예"라고 말했다.
이화진 씨는 "박경원의 경우를 제외하면 내선일체라는 모호한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기 위한 공적 퍼포먼스가 강하다"면서 "형체도, 마음도, 피도, 뼈도 하나가 되라고 하는 불가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옷이라도 바꿔 입으라는 것처럼 보였다"고 설명했다.
◇ 각자의 자리에서 '국가에 서비스한' 여배우들
과거 사치, 방종, 허영 3가지를 대표 이미지로 갖고 있던 여배우들은 일본과 조선에서 각각 영화법, 조선영화령이 내려오면서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 영화인으로서의 전문성과 국민다운 모습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화진 씨는 "군국의 여성을 연기함으로써 전방에 나가 있는 전사들을 위로하고, 주민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여배우로서 할 일이라고 봤다. '네가 있는 자리에서 국가에 서비스하라'는 기조 아래 그런 역할을 주입하고 강조하게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프로파간다 문학과 영화는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텍스트 바깥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맥락을 함께 봐야 한다"고 말했다.
◇ '아가씨' 히데코와 숙희의 차림으로 알아보는 크로스드레싱
이화진 씨는 "남장을 한 김민희, 양장을 한 김태리가 바다를 건너가는 장면은 굉장히 해방적인 느낌을 준다. 민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둘의 로맨스를 굉장히 노골화·공고화하게 하면서도, 이성애적 판타지를 비꼬는 유희성도 느껴진다"며 "굉장히 재미있는 장면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이후, 한일 관계가 비교적 우호적일 때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자주 나타난 구도가 '한국남성과 일본여성의 로맨스'였던 것과 달리, '두 여성의 내밀한 관계'를 조명한 것이 재미있었다고도 전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연애영화는 한국남성과 일본여성이라는 틀을 깨지 않았는데, '아가씨'는 일본인 아가씨와 조선인 하녀를 내세워 관습화된 틀을 깨뜨렸다. 한국영화 맥락에서도 의미 있는 코드"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