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실물이 일반에 공개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이 1940년 안동 진성이씨 가문으로부터 기와집 10채 값을 주고 샀다는 간송미술관 소장본(국보 제70호)이 유일하다.
그런데 2008년 상주에서 또 다른 훈민정음 해례본이 등장했다. 이른바 '훈민정음 상주본'이다. 배익기 씨가 점유하고 있는 이 책은 일부를 촬영한 사진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으나, 책 전체가 공개된 적은 없다.
상주본은 지난 2015년 배 씨가 국가 헌납 조건으로 1천억원을 달라고 요구해 논란에 휘말렸고, 지난 4월에도 배 씨가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해 재산신고를 하면서 책의 가치를 1조원이라고 기재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또다시 주목을 받았다.
9년째 행방을 알 수 없는 상주본은 이번 한글날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법적으로 소유권을 인정받은 문화재청과 상주본의 위치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배 씨가 소송 중이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6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작년 12월 법원에서 승계집행문을 받았고, 재선거 전까지 수차례 접촉하면서 설득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이후에도 배 씨에게 여러 경로로 의사 타진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문화재청이 상주본을 찾기 위한 강제집행을 하지 못하도록 배 씨가 지난 4월 청구 이의의 소를 제기했다"며 "일단은 법정 싸움의 결과를 봐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상주본이 소송의 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배 씨는 골동품업자 조모 씨의 가게에서 고서적을 구매할 때 상주본을 함께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씨는 배 씨가 상주본을 몰래 훔쳐갔다며 물품인도 청구소송을 냈고, 1심 재판부는 집을 수리하던 중 상주본을 발견했다는 배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상주본을 도난품으로 판단했다.
이어 대법원도 2011년 배 씨가 조 씨에게 고서를 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유지해 조 씨의 소유권을 확정했다.
그런데 민사 판결이 난 뒤 배 씨는 상주본을 훔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구속기소 됐고, 1심 재판부는 10년 징역형을 내렸다. 그러나 2심 재판부와 대법원은 배 씨가 책을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배 씨는 항소심 법원에 무죄가 나오면 상주본을 국가에 기증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서면으로 제출했으나,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무죄로 풀려난 뒤에 상주본의 소재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고, 4월 재선거 과정에서 일부가 불에 탄 상주본 사진을 공개했다.
문화재청은 조 씨가 2012년 사망하기 전 상주본의 소유권을 기증받았지만, 상주본의 실물은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배 씨가 상주본의 가치를 알아본 공로는 인정하지만, 국가 소유의 물건을 국가가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배 씨가 상주본을 훼손하는 등의 극단적 행동을 할까 두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