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이 억울함을 풀어 달라." 4.3당시 10대 소녀였던 박순석씨는 70년이 지나 국가에 말한다.
박순석씨는 지난 1928년 제주시 화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본 오사카와 제주를 연결하는 직항 여객선(군대환) 선원으로 일해 집이 유복했다. 박씨는 당시 화북 국민학교를 다니던 2~3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일 정도로 풍족하게 자랐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가져온 세일러복(Sailor suit)을 입고 다니던 박씨를, 사람들은 '박집의 딸'이라고 불렀다. 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일반 학생들에게 박씨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박씨는 "집에는 물을 길어 오는 복순이가 있었고, 잡일을 해주는 장남(머슴)도 2명이나 있었다"며 자신이 부유한 유년을 보냈다고 말했다.
"일본에 있을 때 공습이 많았어요. 공습경보가 울리면 학생들이 시민들을 방공호로 안내했습니다. 각자 역할이 주어졌죠. 도망 다니기 바빠 공부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영어를 배우지 않고 독일어를 가르쳤는데, 그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죠.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해방(1945년)이 되자 다시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학력이 높았던 박씨는 제주에 돌아온 뒤 1948년 우체국 국제 전화 교환원으로 일했다. 일본에서 걸려온 전화를 수신하고 통화 내용을 번역해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교환원으로 한 달도 채 일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일본 조총련에서 '수신'이 왔길래 내가 그걸 해석해줬다가 간첩으로 몰렸어요.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이라고 쓴 거예요. 내가 이북이랑 교신을 하고 있다고 주목을 당한 겁니다"
조총련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약칭으로 친북한계 재일본인 단체다. 이념 갈등이 심했던 당시 경찰은 박씨를 스파이로 몰았다. 화북에 있는 집으로 경찰이 들이닥치자 박씨는 친구네 집으로 도망쳐야 했다.
"간첩, 폭도로 몰렸죠. 여기저기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다 제주시 열안지 오름으로 도망갔어요. 냇가가 있어 먹는 물도 있었고, 일본놈들이 판 굴 곳도 있었어요. 거기서 거주하며 지냈습니다. 당시 5.10선거를 반대한다며 사람들이 산으로 많이 올라갔거든요. 저도 살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제주에 4.3이 벌어지던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첫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하지만 선거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4.3진상보고서에 따르남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전국적으로 경찰서와 선거사무소 등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고,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이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가하려고 북행해 미군정이 긴장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특히 제주에서는 단선, 단정반대가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무장대의 슬로건이었다. 미국은 제주 사태를 조기 진압하기 위해 선거 전 경비대 병력을 증강하고, 군정 수뇌부 현지 시찰 등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처럼 혼란스럽던 시기에 박씨는 산에 올라가 수개월을 산다. 나중에 사람들과 하산하다 군대에 잡혀 제주시 농업학교로 옮겨진다.
경찰은 박씨를 폭도로 규정하며 취조했다. 박씨는 이곳에서 지독한 고통과 폭행을 당했다.
"총으로 머리와 가슴을 치며 '이 폭도년아, 너 남자 몇 명 상대했느냐' 하면서 취조를 했습니다. 위에 옷을 찢고. 반항하면 뺨으로 얼굴을 마구 때리고. 혀 깨물고 죽으려고 입을 꽉 닫으면 입을 손으로 벌리고...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거기서 취조 받고 배타고 전주형무소로 갔습니다."
"말만 재판이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몇 사람이 나와서는 사람들 쭉 세워놓고 '너는 징역 몇 년, 너는 몇 년'이렇게 말했습니다. 거기서 징역 3년 받고 형무소로 간 거죠. 주정공장에서 배타고 전주형무소로 옮겨졌습니다. 5개월 정도 복역하고 ‘특별’ 뭔가로 해서 형무소를 나왔습니다."
형기는 짧았지만 제주에 와서도 고통은 계속됐다. 경찰의 감시는 박씨가 시집을 간 뒤에도 계속됐다.
"남편이 4대 독자였는데, 제가 징역간 걸 알면서도 전부 이해해준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제가 큰 아들을 임신했는데, 경찰이 저를 데리고 가서 2~3일을 잡아 조사를 했습니다. 어느 마을에 무슨 일이 발생하면 꼭 저를 불러서 '산에 얼마나 살았냐, 누구 알고 있느냐'하며 취조를 했어요. 아들이 참 귀할 때였죠. 시부모님한테 걱정을 끼쳐 드려 너무 죄스러웠습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곱게 봐달라며 경찰에 사정하고 그랬습니다. 1년에 3~4번은 그랬죠. 그때 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막 울었습니다. 너무 죄송하다고..."
경찰의 감시는 둘째를 낳고 나서부터 사라졌다. 교사였던 박씨의 남편은 아내의 기구한 삶을 자서전으로 써주겠다며 글을 쓰다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갔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 지금껏 자식들에까지 4.3이야기를 숨겨온 박순석 할머니.
박씨는 평생의 한을 풀어야 겠다고 마음먹고 70년이 지나서야 또 다른 수형인 17명과 재심을 청구했다.
모진 삶을 살아야했던 10대 소녀가 구순의 나이가 돼 국가에 말한다.
"아무런 죄 없이 끌려가 고통 받은 이 세월을. 제발 이 억울함을 풀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