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브라 해방기', 예쁘다는 말이 왜 불쾌한지 말하다

[노브라 해방기 감독과의 대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폭력의 현실과 심각성을 알리고 피해자 생존·치유를 지지하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성인권영화제'(Film Festival for Women's rights, 피움)가 올해로 11회를 맞았다. 올해 영화제는 '지금, 당신의 속도로'(Keep going on with your pace)라는 슬로건 아래 12개국 35편의 작품을 준비했다. 각자의 속도로 세상의 변화를 만들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위해, CBS노컷뉴스는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서울 강남구 CGV 압구정 아트하우스에서 5일 간 진행되는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현장을 전한다. [편집자 주]

허윤수 감독의 영화 '노브라 해방기'. 극중에서 각각 배우 지망생, 감독 지망생으로 나오는 예빈, 신애 (사진=피움 홈페이지)
제목부터 왠지 모를 호기심이 동하는 영화 '노브라 해방기'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칭찬으로 여겨지는 '예쁘다', '착하다'는 말이 여성을 어떤 식으로 옭아매고 불쾌하게 만드는지를 파고든 영화다.

영화 속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는 재혁과 동현이다. 과거 신애에게도 예쁘다고 하며 입을 맞춰오던 재혁은 '초면'인 '예쁜 여성' 예빈을 꼬여내려고 술자리에 합석하고, 시나리오를 보여주겠다며 차로 데려가서는 강간을 시도하는 남성이다. 동현은 재혁 밑에서 AD로 일하는, 유들유들한 캐릭터다.

지나가는 남성 캐릭터들 역시 거의 빠짐없이 편견에 기반한 무례한 말을 거리낌 없이 해 관객을 실소하게 만든다. 젊은 여성인 신애가 불을 빌리려고 하자 욕지거리를 하며 "그러다 기형아 낳아!"라고 윽박지르는 노인, "예쁜 아가씨들이 뭐하다 이제 들어가느냐"는 택시기사까지.

배우 지망생인 예빈도 '예쁘고 착하다'는 포지션이 (젊은) 여성으로 사회를 살아갈 때 더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예쁘고, 예쁘다는 말을 듣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예쁘다는 말 좀 그만 해요. 예뻐서 강간당할 뻔했으니까"라는 예빈의 쏘아붙임이 이를 잘 드러낸다.


22일 오후, 서울 강남구 CGV 압구정 아트하우스에서 영화 '노브라 해방기' 감독과의 대화가 열렸다. 허윤수 감독은 졸업작품 상영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 여성인권영화제에서는 기대했던 순간 관객들의 웃음이 나와 기분이 좋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영화 속에서 선배라는 이유로 내내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예쁘다'는 말로 수작을 부리는 재혁과 그 밑에서 AD로 일하는 동현, 영화와 동명인 '노브라 해방기'라는 졸업작품을 준비 중인 신애 (사진=피움 홈페이지)
그는 "4년 동안 제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예쁘다고 수작 거는 선배라든가… 영화과나 연기과나 모든 과에 많지만 그런 얕은 수들이 되게 많이 먹힌다. 저도 그런 것에 빠져서 (그들이 말하는 게) 대단한 세계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서 그런 것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고 밝혔다.

"나는 이 영화를 여자를 참 좋아한다고 말하는, 영화를 만드는, 취한 후배를 강간하려고 시도한 한 선배를 떠올리며 만들었다"는 말처럼, '노브라 해방기'는 실재하는 누군가에게 바치는 작품이었다.

허 감독은 "원래 영화를 만들고 나서 맨 처음 시작할 때 OOO 선배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좀 더 노골적으로 하고 싶었다"며 "그것까지는 좀 위험한 것 같다고 해서 안 했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문제의 선배가 '노브라 해방기'를 봤는지 묻자 "그 선배는 영화제에는 안 왔다. 하지만 그 선배가 아니더라도 제 경험상 재혁 같은 캐릭터의 사람들도 영화를 보고 저한테 와서 '아, 저 남자 진짜 재수없다', '왜 저렇게 사냐?', '이런 애들이 도대체 어딨냐, 세상에'라고 해서 재밌었다"고 답했다.

영화 속 '동현'의 캐릭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는 질문에는 "처음부터 어떤 상징성을 갖는다는 전제 하에서 시작된 건 아니었다"면서 "어딜 가건 연출에게는 딸려 있는 조연출이 있어서 (이런 캐릭터를) 넣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있더라"라고 말했다.

허 감독은 "위압적인 남성이 있다면, 그 밑에서 그 남성성에 동조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정하지 않고 여기에도 저기에도 동의하는 남성이 있다. 그런 유형의 남성에 관해서도 좀 더 집어넣고 싶어서 그런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허 감독은 "지도교수님은 별로 이런 얘길 안 좋아하시더라. '요즘은 왜 자꾸 이런 얘기를 하려고 그러지? 다른 얘기를 해 봐라'고 하셨는데 막상 완성하고 나니, 다들 '그래도 너 하고 싶은 얘기 했으니까 좋은 것 같다'는 반응이더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인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면 (영화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한 것들이 없었을 텐데, 다 완성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틀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그 이후부터는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좀 더 다른 힘을 갖는 힘을 갖는 영화가 된 것 같다"고 밝혔다.

22일 오후 열린 '노브라 해방기' 감독과의 대화에서 허윤수 감독(왼쪽에서 3번째)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행사는 동시 상영된 '더 헌트'(감독 김덕중), '동경소녀'(감독 박서영), '여자답게 싸워라'(감독 이윤영) 감독과의 대화와 함께 진행됐다.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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