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권혁중 부장판사)는 지난달 31일 기아차 노조원 2만 7424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 法 "모호한 경영 어려움보다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더 중요하다"
재판부는 상여금과 중식대는 ▲정기적 ▲일률적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임금으로 통상임금에 해당하지만, 일비는 고정성이 없어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는 이미 2013년 대법원 판례에서 제시된 통상임금 기준에 따른 예상된 결과였다. 이보다 더 이번 판결에서 눈길을 끄는 지점은 그동안 법원이 모호하게 처리하던 '신의칙' 원칙을 기아차와 같은 대기업을 상대로도 엄격하게 적용했다는 점이다.
2013년 대법원 판례에서는 기업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존립이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경우 지급되지 않았던 추가임금에 대한 청구를 허용하지 않도록 막았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이 노사합의에서 통상임금이 잘못 계산돼 수당을 덜 받았다고 인정받고도, 회사 사정을 이유로 정작 밀린 임금은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사례도 빈번했다.
기아차 소송을 앞두고 경영계와 보수언론은 대대적인 여론전을 펼쳤다. 하지만 재판부가 신의칙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해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나 '기업 존립의 위태'는 모두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내용"이라며 경영상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근로자들이 마땅히 지급받았어야 할 임금을 후에 추가 지급돼야 한다는 점에만 주목해 '기업존립'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노동자들의 명확한 임금 청구권이 모호한 기업 경영상 어려움을 방지하는 것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로 115곳에서 진행중인 다른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질 것으로 기대된다. 비록 대법원 판결은 아니지만, 이번 판결을 내린 중앙지법 41부는 노동 소송 전문 재판부인만큼 권위있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번 판결로 통상임금을 줄이기 위해 기본급을 대폭 줄이던 한국 기업들의 꼼수 관행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통상임금을 쉽게 말하면 노동자가 늘상 받는 임금이라는 뜻으로, 핵심은 연장근무 등 각종 가산수당을 정하는 산정 기준이 된다는 데 있다.
근로기준법에서는 연장·야간·휴일 근무를 할 경우 시급의 50%를 가산해 수당을 지급하도록 하는데, 이 때 시급 기준이 통상임금이다.
반면 상여금은 '임금 이외에 특별히 지급되는 급여'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원래 상여금의 취지대로라면 회사에 특별히 호재가 발생하거나 매출이 크게 오를 때 보너스 개념으로 지급되야 하는 임금이다.
하지만 장시간 노동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 기업들은 기본급을 크게 낮춰서 통상임금을 줄이고, 대신 상여금으로 이를 메우는 '조삼모사'식 임금체계를 유지해왔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자리 나누기 정책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 노동자들을 장시간 근무하도록 해도 낮은 통상임금 덕분에 기업들은 수당에 대한 추가 부담이 크지 않아 신규 인력으로 이를 대체할 필요가 없었다.
기아차 노동자 측 대리인을 맡은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김기덕 변호사가 "통상임금은 노동시간 문제"라며 "아무리 법원에서 통상임금 범위를 늘려잡아도 연장근무, 야간근무 없이 법대로 주40시간만 일하고 연차휴가를 모두 쓰면 사용자에게는 아무런 추가 부담이 없다"고 지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통상임금 확대에 대한 경영계의 빗발치는 우려는 뒤집어 말하면 한국 사회에 얼마나 장시간 노동이 만연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 통상임금 법제화… 판례의 수레바퀴 거꾸로 돌리기보단 통상임금 범위 더 넓혀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경영계는 서둘러 통상임금에 관련 법 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실제로 통상임금의 정의와 범위는 법률에 모호하게 규정된 상태다. 근로기준법 시행령 6조에 '근로자에게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소정근로 또는 총근로에 대해 지급하기로 정해진 시간급금액, 임금금액, 주급금액, 월급금액 또는 도급금액'이라고 정의됐을 뿐이다.
그 대신 실질적인 구속력을 가진 것은 고용노동부 예규로, '소정근로시간에 대하여 근로자에게 지급하기로 한 기본급과 정기적, 일률적으로 임금산정기간에 지급하기로 정하여진 고정성 수당'이라고 정의됐다. 그동안 통상임금은 기본급 및 고정수당으로만 계산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통상임금의 범위는 이후 법원의 해석에 따라 바뀌어왔다. 1996년 강원 삼척군 의료보험조합 판결에서 대법원이 '모든 임금은 노동의 대가'라며 통상임금의 정의에 균열을 냈다.
이후 2012년 금아리무진 소송에서 정기상여금을 처음으로 통상임금에 포함됐고, 2013년 갑을오토텍 소송에서 통상임금의 3대 요소가 규정되는 등 노동계가 소송을 거듭하면서 통상임금의 범위를 정부나 국회 대신 확인해온 셈이다.
일단 노동부 관계자는 "아직 정부 차원에서는 통상임금에 관한 법 개정 등은 따로 추진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대신 국회에는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이 대표발의한 근로기준법 일부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하지만 이는 기존 근로기준법 시행령에 규정한 통상임금의 정의를 그대로 옮겨놓고, 통상임금에서 제외할 항목만 대통령령으로 따로 정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노동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소송을 통해 넓혀왔던 통상임금의 범위를 현상태로 제한하는 것에 그칠 뿐 아니라, 자칫 '경제 살리기' 명목으로 이미 인정된 통상임금 항목을 좁혀놓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김 변호사는 "이미 통상임금에 관한 근로기준법 해석은 대법원의 판례가 있으니 그대로 따르면 된다"며 "그동안 통상임금에서 제외된 복리후생 명목의 금품 등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면 경영계의 부담을 절충하기 위한 의도로 읽힐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