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생 지영씨'들은 왜 아이 낳기가 두려울까

(사진='SBS스페셜' 방송 화면 갈무리)
"대학교에 갔을 때 거의 성비가 반반이었는데, 회사에 가면 남자 80에 여자 20이잖나. 그 반반이었던, 한 30% 정도의 여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면 굉장히 큰 좌절이 온다," - 신생 벤처기업에 다니는 89년생 김지영 씨

"(옆 팀 동료가 임신을 하자) 같이 들어가던 회의이지만 '언젠가는 출산을 하러 가야 되니까 그때까지 있지 못할 것 같으니 쟤는 빼고 회의를 하자'는 거다." - 증권사를 퇴사한 85년생 강지영 씨

"(이전 회사에서) 남자 임원분이 있으면 '아, 능력 있다!' 이렇게 보일 수 있는데, 여자 분이 이렇게 (올라가면) 약간 '아… 독하다' '아집 있다' 이런 식으로 비쳤던 것 같다." - 외국계 컨설팅업체에 다니는 86년생 김지영 씨

지난 27일 밤 방송된 'SBS스페셜'에서 소개된 80년대생 지영 씨들의 이야기다. '82년생 김지영 - 세상 절반의 이야기'라는 주제를 다룬 이날 방송의 모티브는 화제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었다.

소설은 1982년에 태어난 김지영이라는 평범한 여성이 취업·결혼·출산 등 삶의 과정에서 마주하는,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과 구조적 불평등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소설로 그치지 않고 이날 다큐멘터리 방송으로 영역을 넓힘으로써, 현실의 '80년대생 지영 씨'들을 소환해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을 건드렸다.

"친구들, 결혼한 유부남도 있고 총각도 있는 술자리인데 '네가 아기를 막상 낳고 보면 남한테 맡길 수 있을 것 같냐'고 '모질다' '네가 그렇게 공부해서 사실은 얼마나 많이 버냐'고 '그런 거 아니지 않냐'고…." - 박사 과정과 임신 사이에서 고민하는 87년생 김지영 씨

"어쨌든 임신을 하고 육아를 하면 (직장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니까…. '아, 내 일이 멈춰질 수도 있다' 또는 '내가 하던 커리어들이 중단될 수도 있다'(라는 걱정이 든다). 그러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 예비엄마 88년생 우지영 씨

"결혼하고 애 낳고 하고 다시 일을 구할 때 강등된다고 하잖나. 신분이라고 표현하면 좀 그렇지만, 신분 강등되는 느낌, 그러면서 되게 속상하고 자존심 상한 일도 많고, 그랬던 것 같다." - 워킹맘 82년생 김지영 씨

◇ "사실 결혼은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데…"

2년차 전업주부인 87년생 김지영 씨(사진=SBS 제공)
2년차 전업주부인 87년생 김지영 씨는 "결혼은 사실 별 그렇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데, 저는 아기 낳은 게 제 인생에 진짜 변환점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아기를 낳고 나서 이제 몸이 힘들거나 그런 거 때문에 우울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이제 나의 사회적 관계가 다 끊기고 아기 위주로만 모든 생활이 돌아가는 거, 그런데서 오는 우울감이 진짜 있는 것 같다. 물론 아기가 너무 예쁘지만 힘들 때도 많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아이와 함께하는 잠깐의 외출에도 지영 씨는, 바리바리 유아용품을 챙겨 아이를 품에 안고 움직여야 한다. 요즘 그가 아이와 외출할 때 신경쓰는 일은 따로 있다. 바로 어린 아이의 입장을 제한하는 '노키즈존'(No kids zone)이다. 아이가 들어갈 수 없는 장소가 최근 늘어나고 있어, 입장을 거절당하지 않을까 자꾸만 마음을 조리게 되는 것이다.

한 커피숍에서 점원과 이야기를 다누던 지영 씨는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포장하시나요?" "아니요. 아기, 못 들어가죠?" "네. 저희가 노키즈(존)라서…. 아예 아기가 못 들어와요." "밖에서도 안 돼요?" "네"

어렵사리 자리를 잡더라도 아이의 흔한 투정에 혹시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개념 없는 엄마"라며 맘충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 끝에 지영 씨는 황급히 자리를 뜬다.


"결혼하면서 '집에만 있어야지'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갑자기 아기 때어나고 이렇게 하다 보니 집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갑자기 제 의지와는 상관 없이 전업주부를 하게 된 것 같다. 일할 수 있을 만큼 배웠는데 그게 이렇게 없어지게 될까 봐 걱정도 되고, 저는 엄마로 살기도 하지만 제 인생이 또 있잖나. 그래서 이제 그거를 혹시 잊고 살게 되지 않을까, 앞으로 사회로 못 나가게 될까봐 걱정이기도 하고…."

◇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이 더 컸다…사실 그렇지 않다"

외국계 경영자문 회사에서 일하는 86년생 김지영 씨(사진=SBS 제공)
여기 또 다른 지영 씨가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국계 경영자문 회사에서 일하는 미혼의 86년생 김지영 씨다. 지영 씨의 업무는 아침 8시에 시작된다. 그는 이 회사의 최연소 팀장이다. 한 회사 후배는 "이 회사에 전설이 하나 있다. 저 방(지영 씨 사무공간)의 불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이라고 전했다.

카메라는 모두가 퇴근한 늦은 밤, 회사에서 혼자 업무를 보는 지영 씨를 비춘다. '야근을 얼마나 하냐'는 제작진의 물음에,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그때그때 다르기는 한데 평균적으로 금요일 빼고는 다 한다"고 답했다.

지영 씨는 "2008년, 2009년 그때 취업을 하려고 지원했던 회사가 한 50개. 학생수첩 마지막까지 거의 다 채웠었다"며 말을 이었다.

"서류나 이런 부분은 많이 통과가 됐었고, 그런데 최종적으로 합격한 데는 잘 없었다"며 "(첫 직장은) 국내에서 음료를 가장 크게 만드는 회사였고 거기는 이제 기획전략 쪽으로 들어갔다. 우스갯소리로 '이 자리 남자 뽑으려고 그랬는데 여자가 뽑혔네?' 이러더니, 저빼고 팀원이 다 남자였다. 여성분들이 많이 없고, 승진자 발표가 나도 열 명 중에 한 분만 여자이고, 이런 거 봤을 때는 '왜 저렇지?' (생각했다.) 내가 좋은 선례를 만들어서 그렇지 않다라는 거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국의 유리천장지수는 OECD 최하위(영국 이코노미스트 2016)에 머물고 있으며, 유리천장을 체감한 직장인은 2명 중 1명(54.3%, 사람인 2017)에 달하는 탓이다.

지영 씨는 "제가 뭐 임신을 해서, 예를 들어 배가 불러와서 클라이언트 미팅을 한다. 또는 몸이 힘들어서 새벽 2시까지 일은 못하고 한 6, 7시쯤 퇴근한다고 했을 때, 이런 상황에서 부담이 그대로 팀한테 갈 텐데, 그러면 팀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현실적인 생각은 든다. 고민은 든다"고 전했다.

새벽 4시 30분에 업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지영 씨. 그는 "'내가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어딨어'라는 생각이 훨씬 컸었다. 혹시나 안 되면 보이지 않는 사회적 패널티가 있다기 보다는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다"며 "사실 그렇지 않다. 아직까지는 이런 차이가 있네라는 것이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 "나중에는 딸들이 공감 못할 얘기가 됐으면…"

(사진='SBS 스페셜' 방송 화면 갈무리)
이날 방송 말미, 80년대생 지영 씨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워킹맘인 82년생 김지영 씨는 "부담감, 책임감 이런 게 진짜 몇 중으로 쌓여서 저를 항상 억누르고 있는, 그러니까 항상 불안하고 진짜 언제 상담을 받아볼까? 생각이 들 정도로…"라며 결국 눈물을 보였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다른 지영 씨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 겪는 차별에 공감하기에 다져져 온 '자매애'로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는 모습이었다.

경영자문 회사에 다니는 86년생 김지영 씨는 "보면 엄마라는 역할도 있고, 내가 사회를 살아가면서 내 커리어가 있고 내 삶이 있는 거잖나. 여성으로서 나의 삶도 있는 건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상충이 올 것 같다"고 전했다.

초등교사인 82년생 김지영 씨는 "어렸을 때부터 그냥 체득된 것이 남한테 좀 싫은 소리 듣거나 부당한 거 봐도 그냥 참으면서 살고 그러다보면… 그렇게 항상 감내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전업주부인 87년생 김지영 씨는 "나중에 (딸 시은이가) 보면 이게 공감 못할 얘기가 됐으면 좋겠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그런 얘기를 신랑이랑 많이 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남성은 가장으로서 직장에서 돈을 벌어오고, 여성은 아이 낳고 기르면서 집안일을 돌봐야 한다는 오래된 생각은 여전히 유효할까. 이러한 남녀 역할 구분 탓에 빚어지는 첨예한 갈등에도, 우리 사회는 왜 여전히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것일까.

'성장'에 매몰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절대다수의 남과 여가 희생양으로 전락한 지금, 여기서 얻어지는 이익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절대소수가 있다. 막상 그들이 숨어버린 가운데 벌어지는 '을'과 '을'의 싸움을 우리는 언제까지 지속해야 할까.

한국 사회에서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여성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거두는 첫걸음은 그들에게 다가서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날 방송의 내레이션을 맡은 가수 이적의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지영 씨들의 하루가 또 다시 밝아 왔습니다. 다들 조금은 홀가분해졌나요? 아니면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분인가요? 적어도 흔해서 슬펐던 그 이름만큼은 조금 특별해지지 않았을까요? 다들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동안 잘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모두들 누구의 아내도 아닌, 누구의 엄마도 아닌 지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삶을 살기를 마음을 다해 응원할게요. 지영 씨들이 들려줄 세상 절반의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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