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말년에게는 두 가지 흐름이 있어요. 하나는 위안부 소녀들의 버팀목이자 정신적 지주이고 다른 하나는 소지섭 오빠가 연기하는 종로 주먹 최칠성과의 멜로입니다. 류승완 감독님에게 디렉션을 받을 때도 멜로가 있었고, 저는 그 감정을 찾아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언론배급 시사회를 앞두고는 긴장감 때문에 잠까지 설쳤다. 장면 하나 하나를 볼 때마다 실제 촬영 현장이 떠올라서 자기 연기는 거의 보지 못했다고.
"두 시간도 못자고 시사회에 왔던 거 같아요. 촬영이 정말 고되고 힘들기는 했거든요. 그런데 제 촬영이 없어도 거의 현장에 매일 나가있었어요. (황)정민 오빠도 들어가질 않았고요. 계속 끝나는 걸 지켜보고, 중요한 장면 보면서 응원하고 모니터링해줬어요. 그래서 장면이 보이는게 아니라 저 장면을 찍었던 에피소드가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이정현은 뭐든지 '조심스럽다'고 했다. 실제 군함도라는 섬이 가진 강제 징용의 아픈 역사 때문이다. 군함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일본은 약속과 달리 안내 책자에 강제 징용 역사를 싣지 않고 있다.
"다 같이 '군함도'를 하자고 모인 큰 힘이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아직도 강제 징용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대해서 정말 화가 났거든요. 모든 이야기는 다 허구이지만 그런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모여서 너무 힘겹게 찍었거든요. 사실 실망하신 분들도 있는 거 같아서 많이 조심스럽고 마음이 무겁기도 하네요."
"소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말년은 마지막에는 일본인들에게 총까지 겨눠요. 일방적으로 슬픈 일을 당하는 게 아니라, 강인한 여성으로 그려줘서 좋았어요.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군함도와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다큐를 전부 봤거든요. 실제 증언 내용을 보면 조선 면장이나 이런 분들이 돈 벌러 간다고 하면서 속이고 위안소로 보내는 경우가 있었어요.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까지 상업 영화에 넣은 게 굉장히 용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 때문에 매일 감독님을 찾아가니까 연출부로 들어가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작은 체구이지만 그 에너지는 크다'. 이정현과 '군함도'에서 가장 많은 호흡을 맞췄던 소지섭의 이야기다. 두 사람이 조선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일본군들과 벌이는 전투장면에서는 이러한 이정현의 면모를 체감할 수 있다.
"길고 총 무게가 5㎏이나 되거든요. 휘청댈 정도였어요. 진짜 현장에 가보면 기절할 게 100~200명 단역 배우들이 분장하고, 액션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커다란 폭탄 다섯개는 터질 준비하고 있지, 또 다른 배우들은 피아노줄에 매달려 날아갈 준비하고 있지. 그냥 총을 쏴서 화약이 나가면 끝나는 거예요. 이 모든 사람들끼리 합이 맞아야 되는 건데 NG가 나면 모든 세팅을 다시 가야 되거든요. 너무 부담감이 커서 덜덜 떨고 있었어요. 그런데 (소)지섭 오빠가 계속 '정현아, 1번 장전한다. 2번 뒤로 물러선다' 이러면서 행동을 순서대로 말해줬어요. 칠성 패거리도 그런 식으로 오빠가 리드를 했고요. 아마 그런 도움이 없었으면 사고가 났을 거 같기도 하고, NG가 났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면 제작비나 스케줄에 너무 치명적이거든요. 정말 지옥같은 현장이었는데 그만큼 열정이 대단했기 때문에 행복했어요."
"크고 작은 상처는 있었죠. 그런 상처 생기면 숙소에 와서 샤워할 때 발견하거든요. 그러면 그래도 내가 뭐 하나 하고 왔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애착이 컸죠. 영화적으로는 아쉽다는 분들도 있지만 우리들의 노력은 정말 대단했어요. 기록을 보면 실제로 뼈밖에 없을 정도로 말랐다고 나오니까 단역 배우들이 이미 살을 빼고 있더라고요. 막 10~20㎏ 씩 뺀 분들도 있었어요. 정말 영화 속에서 분량 자체가 너무 적게 나오는데도…. 증언집을 보면 위안부 피해자들도 밥을 먹을 시간도 없이 그런 수난을 당해서 극단적으로 마른 분들이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한 번도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살을 빼본 적은 없는데 어떤 책임감이 생겨서 저도 하겠다고 했어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이긴 했는데 다이어트 밥차가 따로 있어서 그걸로 식단 관리를 했고요."
영화 속 말년은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인물이다. 마음 속에 응어리진 한과 풀지 못한 감정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곤 한다. 그래서 말년이 뱉는 욕은 거칠면서도 어딘가 애끓는 감정이 묻어난다. 실제로 이정현은욕이 많은 대사 때문에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
"욕이 너무 힘들었어요. 후시 녹음만 두 번을 했거든요. 그냥 너무 너무 죄송했죠. 내가 왜 이것밖에 못 하는지 생각도 했고요. 힘들었어요. 10일 뒤에 다시 해야겠다고 하셔서 그 10일 동안은 정말 말년이의 감정을 갖고 살았어요. 그 감정을 10일 내내 갖고 있으니까 그냥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거예요. 감독님이 '오케이'했는데 저는 뛰쳐나갔어요. 말년이 감정이 너무 힘들어서요. 욕 잘하는 (황)정민 오빠가 부러웠죠."
이번에는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이정현 또한 다양성 영화에 대한 애착이 크다. 상업영화나 비상업영화 할 것 없이 할 만한 여성 캐릭터가 있는 영화라면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다만 상업영화에서 자신이 입지를 쌓으면 다양성 영화에도 더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에는 대규모 상업 영화들 중에 여성 배우들이 할 수 있는 영화들이 얼마 없어요. 그런데 다양성 영화는 장르도 다양하고, 여성 원톱 영화가 정말 많아요. 참신한 시나리오도 많거든요. 현장에서 느끼는 행복 지수는 똑같은 거 같아요. 둘 다 찍고 싶은 게 제 바람이죠. 다만 제가 상업영화에 나와서 인지도를 얻으면 나중에 다양성 영화 찍을 때 제작비가 조금이라도 올라가서 모두들 더 나은 환경에서 촬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