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말까지 45일간 시민 만나고 '고향'으로
14일 오전 6시 55분. 왼쪽 두 번째 좌석에 '평화의 소녀상'을 태운 151번 시내버스가 서울 강북구 우이동 차고지를 출발했다.
버스 운전기사 안형우(48) 씨는 "제 개인적으로 최고의 승객을 모시게 됐다"며 긴장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안 씨는 "늘 마음만 있었을 뿐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이런 기회가 있어 영광"이라며 "45일간 안전 운행하며 많은 분께 소녀상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소녀상이 탄 버스는 '세계 위안부의 날'인 이날부터 9월 30일까지 45일 동안 서울 시내 곳곳을 누빈다. 우이동에서 출발한 버스는 미아사거리, 안국역, 숭례문, 신용산역을 거쳐 흑석동 중앙대 앞에서 회차한다.
151번을 운영하는 동아운수는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소녀상을 만나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버스 안에 소녀상을 설치했다.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과 크기·모양이 같다.
한동안 홀로 앉아있던 소녀상은 7시께부터 출근길 버스를 타는 승객과 만났다. 시민들은 놀란 표정으로 한동안 소녀상을 자세히 바라보기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도 했다.
한 60대 승객은 "30년간 151번 버스가 지나는 곳에 살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탄 아이나 학생들에겐 아픈 역사를 배울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운수가 151번에 소녀상을 설치한 이유는 노선이 성균관대, 성신여대, 한성대, 중앙대, 숙명여대 등 대학교 7개와 여러 중·고등학교 앞을 지나기 때문이다. 안국역 인근 일본대사관도 거친다. 하루 800명 이상이 이 버스를 이용한다.
일본대사관 앞을 지날 때는 소녀의 목소리로 부른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위안부를 그린 영화 '귀향'의 OST에 담긴 곡이다.
이날 개학해 학교에 간다는 대동세무고 전솔아(17) 양은 소녀상을 보고 "소녀들이 우리 나이 때 위안부로 끌려간 것 아니냐"며 "얼마나 끔찍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대동세무고 박유리나(17) 양은 "시민 모금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다룬 영화도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소녀상 버스처럼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행사가 생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소녀상 버스를 기획한 동아운수 임진욱 대표는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에 만족하는 시민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정부에서 재협상 얘기가 나오는 시점에 국가나 지자체가 아니라 개인이 문제 해결에 이바지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임 대표는 "시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겁이 나기도 한다"며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버스를 탄 시민들 사이에선 개인 차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는 의견도 나왔다.
회사원 최인호(36) 씨는 "민간 차원에서 관심을 환기하는 것도 좋지만, 할머니 한 분 한 분이 돌아가시고 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좀 더 세게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버스 운행 첫날 승객 중에는 박원순 서울시장도 있었다.
안국역에서 버스에 탄 박 시장은 소녀상을 보자마자 "아이고, 여기 계시구나"라고 외치며 손을 어루만졌다.
박 시장은 "일본 정부와의 사이에 서로 이견은 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서라도 우리 국민이 적어도 정서상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본과 주변국 사이에 과거 청산과 관련한 본질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소녀상 건립과 같은 일이 점점 더 온 세계로 퍼져 나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151번 버스 5대에 하나씩 설치된 소녀상은 버스에서 내린 뒤에는 추석 연휴를 맞아 '고향'으로 내려간다. 대전, 전주, 대구, 목포, 부산에 설치된 다른 소녀상을 찾아가 옆에 놓인 빈 의자에 앉게 된다.
소녀상이 탄 151번 버스와 위치는 홈페이지(bus151.com)에 실시간으로 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