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권한을 가진 문화재청은 "나무를 옮겨 달라"는 수년간의 요구에도 고개만 내젓고 있다. 이에 이순신 장군 종가와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가 다시 한 번 진정을 준비했다.
◇ 사당 앞 47년의 세월…'뿌리 깊은 금송'
지난 8일, 광복절 72주년을 1주일여 앞둔 현충사는 평화롭고 단정한 모습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충사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사당은 푸른 녹음에 둘러싸인 채 은은한 향내를 풍기며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사당 앞 고야마키, 우리 표현으로 금송(金松)은 6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상태다.
지난 1970년 12월 6일, 청와대에 있던 금송이 현충사에 옮겨 뿌리를 내렸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이뤄졌던 '현충사 성역화 사업'의 일환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금송 한 그루를 사당 앞 오른편에 직접 헌수했다. 그러나 이 금송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자리를 이어 사용한 청와대에 남겨져있던 일제의 잔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본이 원산지인 금송은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나무 중 하나며, 일본 신화에도 등장한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고사기'에 따르면, 신이 일본에 심어야할 나무와 그 용도를 정해줬는데, 그 중 한 나무가 '고야마키'라 하는 금송이었다"며 "고급관리 등의 관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등 일본의 대표적인 나무"라고 설명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노태우 정부는 지난 1991년 문화재청에 지시해 '현충사 조경 개선 계획안'을 수립했다. 제시된 7개 항의 개선 방안 중 '1번'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이 금송을 사당 본전 밖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문화재제자리찾기가 지난 2010년 문화재청에 진정서를 접수하고 2011년 행정소송에 들어가는 등 움직임에 나섰으나 결과는 '1심 각하' '항소 기각'이었다. 원고 측이 문화재청의 해당 결정에 영향을 받는 구체적 이익이 없고 간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데 불과하단 이유였다.
◇ '시대성과 역사성' 때문이란 문화재청, 이순신 종가 반발에 직면
문화재청이 금송의 현상유지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시대성'과 '역사성'이다. 문화재청은 2011년 당시 "현충사 본전에 식수돼 있는 금송은 본래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동측 창 앞에 있던 것을 1970년 12월 6일 당시 박 대통령이 헌수한 것"이라며 "해당 금송은 1970년대의 시대성과 박 전 대통령의 기념식수 헌수목이라는 역사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결정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와 관련해 수목을 이식하거나 시설물을 짓는 등 모든 행위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현상 변경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전문가로 구성된 문화재위원회가 이미 지난 2000년과 2010년, 2015년에 세 차례에 걸쳐 검토한 바 있는데 학계에서도 이견이 많은 문제"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순신 종가'는 이에 반발했다. 종부 최순선 씨는 "박 전 대통령이 아니면 이순신 장군이 영웅이 아닌 거냐"며 "애국과 애민의 리더십에 대해 자손들은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금송은 그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고 역사성에도 맞지 않는다"며 문화재위의의 '역사성' 근거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순신 종가는 진정서를 통해 "금송은 도쿄의 메이지신궁 등에 식재돼 일본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으며 문화재청 역시 이를 '사적지 부적합 수종‘으로 분류해 점차적으로 제거하겠다고 밝혔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후 정부가 과거사에 대한 적폐청산을 언급하고 있는데 금송의 이전 문제도 본격적으로 논의될 시점이 왔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또 문화재청에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여 현충사의 금송을 경내 밖으로 이전해 줄 것을 요청 드린다"며 "문화재위원회를 통해 이전에 관한 사항을 심의해달라"고 전했다.
현재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관계자는 "사당 권역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의견을 한 번 더 구해볼 예정"이라며 "올해 안에 금송을 비롯해 정비가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 살피고 문화재위원회의 검토에 따라 조치할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밝힌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