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역대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 받은 것은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김 전 실장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문화예술 지원 배제대상자를 선정하도록 지시한 일도 보고를 받은 적도 없다'며 범행 사실 일체를 부인해 왔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황병헌 부장판사)는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 전 실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김기춘 등)들은 청와대와 문체부의 권력을 이용해 정치권력 기호에 따라 문화예술계 개인과 단체에 대한 지원배제를 일방적으로 지시함으로써 공공성을 훼손시켰다"고 질타했다.
또 "좌편향 시정을 위한 정책결정은 적법절차로 투명하게 처리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고 비겁한 방식으로 진행됐다"며 "배제 잣대로 야당지지와 시국선언 이유 등을 동원한 것은 심사기준과 무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예술과 창작활동을 위한 국가지원은 작가에겐 창작기회를 부여하고 수요자에겐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블랙리스트 작성은) 문화 표현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훼손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전 실장은 재판장이 주문을 읽고 실형 3년을 선고하는 동안 무표정한 모습으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행사실을 부인하고 책임을 회피해 국민들이 기대하는 진실을 외면했다"고 질타했다.
김 전 실장은 박근혜 정부 취임 1년차인 2013년 말부터 "좌파들이 문화계를 장악하고 있다"고 울분을 토하고 "문화계 권력을 되찾을 것"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등을 통해 수시로 지시했다.
특히 2014년 1월 3일 열린 실수비(비서실장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좌파성향 국고 보조금 지원 현황을 전수조사해서 시정조치 하라"고 지시했고 다음날 4일엔 "국가가 좌파 위에 떠있는 섬과 같다. 대통령 혼자만 뛰고 내각은 뛰지 않는다. 불퇴전의 각오로 투지를 갖고 싸울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김 전 실장은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에게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박 전 대통령 집안과 2대에 걸쳐 인연을 맺은 최측근 인사로 꼽힌다.
법무부 검사로 재직한 1970년 초 유신 헌법의 초안을 만드는 실무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노태우 정부에선 검찰총장과 법무 장관을 연이어 지냈고, 항상 입으론 법치주의를 외치면서도 보수·우파 비판 세력에 대해선 '좌파'로 규정하고 탄압에 몰두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를 두고 '공안통치의 화신'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이다.
그는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부산지역 관계 기관장들을 식당에 불러 모아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감정을 자극했다. 공작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초원복집 사건'이다. 그가 법무장관을 그만둔지 불과 두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의 이러한 뿌리깊은 공안통치 집념은 박근혜 정부로 이어진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건으로 대통령 파면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면서 최고 권부 참모로서의 마지막 공직 업무는 불행하게 마무리됐다.
그는 재판에서 '망한 왕조의 도승지'라며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인생 말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화제를 모았다.
"재판할 것도 없이 독배(毒杯)를 내리면 깨끗이 마시고 이 상황을 끝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