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정치군사적 대결의 해소'로 요약되는 근본문제를 거듭 강조하는 것은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회담 의지에 편승해 협상력을 높이고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는 압박 전략으로 풀이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에서 "먼저 쉬운 일부터 시작하자"며 북한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 평창올림픽 북한참여, 군사분계선 적대행위 상호 중단 등을 순차적으로 제안했다. 이는 정부의 남북군사당국회담과 남북적십자회담 제의로 공식화됐다.
반면 북한은 정부의 회담 제의에 대해 거부도 수용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끌며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가 군사당국회담을 하자고 한 21일을 넘기고서도 아직 답변이 없다. 북한은 그러면서 줄곧 남북관계의 '근본적 개선', 또는 '근본문제의 해결'를 요구하고 있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15일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에 대한 첫 반응에서도 "북과 남이 함께 떼여야 할 첫 발자국은 당연히 북남관계의 근본문제인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말하는 근본문제는 대남기구인 민족화해협력위원회 이름으로 지난달 24일 우리 정부에 던진 9개 공개 질문장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북한 민족화해협력위는 "북남관계개선을 위한 근본적이고도 원칙적인 문제에 대해 함구무언하고 있다"고 우리 정부를 비난하며 ▲ 외세공조 배격 및 자주적 남북관계 개선 ▲ 한미합동군사연습 중지 ▲ 삐라 살포 중지 등 비방·중상 중단 ▲ 남북 군사적 충돌 위험 해소 위한 실천 조치 ▲ 남북대화에서 북핵 문제 배제 ▲ 제재-대화 병행론 철회 ▲ 보수정권의 대북정책 청산 조치 실행 ▲ 중국식당 집단탈출 여종업원 송환 ▲ 민족대회합 개최 등 9개 항의 선행조건을 제시했다.
이 중에서 한미공조 배격, 한미공동군사훈련 중지, 제재-대화 병행론 철회, 남북대화에서 북핵문제 배제 등의 요구는 정부가 북핵문제의 주도적 해결 기조를 강조하고 한미동맹이 유지되는 한 수용 불가능한 사안이다.
그러나 삐라 살포 중지 등 비방·중상 중단, 남북 군사적 충돌 위험 해소 위한 실천 조치 등은 정부가 제의한 군사당국회담에서 논의할 수 있는 의제이다.
중국식당 집단탈출 여종업원 송환 문제도 북한의 반응에 따라서는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현안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 회담에서의 논의가 될 여지가 없지 않다.
북한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회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침묵하는 것은 회담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이익 계산을 둘러싼 고민이 끝나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남측의 적극적인 회담 의지를 활용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문재인 정부를 압박하는 측면도 강하다는 관측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이른바 북한 '최고 존엄'의 지시라는 군사분계선 확성기 방송 중단과 다음 달 열리는 한미을지연합훈련 등이다.
조선신보는 지난 11일 "조선반도(한반도) 긴장격화의 주된 요인인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할 결단을 내릴수 있는가"를 물은 뒤 "북측은 남조선당국의 관계개선의지를 귀에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가장 긴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각오와 행동을 근거로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는 결국 '근본적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각오'을 상징할 만한 조치를 먼저 취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일부 전문가들은 정부가 오는 27일 정전협정 체결일을 맞아 군사분계선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의 일시적인 중단 등을 선제적으로 조치하면 북한의 호응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 사회에서 적지 않은 논란을 야기할 공산이 크다.
정부는 북한의 침묵에 대해 "오는 27일까지는 대화 제의가 유효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북한이 27일을 넘기고서도 답변을 하지 않으면 문재인 정부의 첫 회담 제의는 현실적으로 불발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관심을 표명하리라 여긴 남북군사당국회담이 불발되면 다음 1일에 열자고 한 남북적십자회담의 개최는 더 어렵다. 특히 8월에는 북한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미을지연합훈련이 실시되는 만큼 남북대화는 당분간 개최의 계기를 얻기 어렵다는 관측이다.
북한이 다음 주에 회담수용이든 회담 수정제의이든 호응을 해오느냐가 남북관계의 주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