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팔아 여비 마련" 9년 전 시작된 '반환작전'
문정왕후는 조선왕조 제 11대 왕인 중종의 계비로 '문정왕후어보'는 문정왕후에게 '성렬대왕대비'라는 존호를 바치면서 제작됐다. 금으로 만들어진 이 어보는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으로 불법 반출됐고 그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반세기 넘게 그 행방이 묘연했던 어보는 2009년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가 미 국무부의 1950년대 공문서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초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지난 2009년 1월, 미국으로 반출된 것으로 알려진 회암사(寺)의 유물을 찾기 위해 미국 보스턴으로 떠났다.
이에 이들은 이 도장이 국내에서 빠져나간 '옥새'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끈질긴 추적에 들어갔다. 그리고 2년 만인 2011년 1월 28일, 미국 볼티모어 지역지 '볼티모어 선'의 1953년 자 기사를 찾으면서 이 도장이 문정왕후어보라는 점과 미군에 의해 약탈된 문화재라는 기록을 발견했다.
◇ 우연히 찾은 '美 공문서'… 27살에 참여한 미국과의 협상
이렇게 우연히 발견한 미 국무부 문서와 오래전 신문기사를 통해 문정왕후어보가 약탈문화재라는 점을 확인한 이들은 같은 해 6월, 미국 'LA카운티박물관'에 "미국법에 따라 약탈문화재를 돌려달라"며 반환요청서를 보냈다. 하지만 박물관 측의 답변은 없었다.
이들은 2년 뒤인 2013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박물관 측에 면담을 요청했다. 당시 면담을 요청한 구진영(31) 연구원은 "정부나 영사관의 도움이 없어서 뉴욕에서 직접 우편으로 박물관에 요청서를 보냈다"며 "일반시민의 면담요청이었던 터라 기대를 안했는데 2013년 7월 11일, 박물관과의 첫 면담이 성사됐다"고 설명했다.
미국 서부지역 최대규모이자 최고권위인 LA카운티박물관과의 첫 면담에 참여했던 구 연구원은 당시 27세였다. 구 연구원은 "20대의 나이에 옷도 몇 벌 없는 상태였는데 반환면담이 잡히다보니 정장도 부랴부랴 사 면담장에 들어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2009년 시작된 시민들의 '문정왕후어보 반환작전'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문정왕후어보는 곧장 돌아오지 못했다. 문화재청이 '정부와 정부가 받는 공식창구로 반환하는 것이 낫다'며 미국 국토안전부(HSI)에 수사를 요청, HSI가 이를 압수했기 때문이다.
이후 구 연구원은 한미정상회담에서 대통령끼리 주고받는 형식으로 조속히 들여와야한다며 '반환캠페인'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14년 4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대한제국 국새 등 9점이 반환됐고 올해 진행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드디어 문정왕후어보와 현종어보가 반환됐다.
◇ "어보 돌아온 날 서럽게 울었죠" 쾌거에도 '시민단체 성과'는 언급 無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어보 환수를 위해 뛰었던 '문화재제자리찾기'였지만 정부의 어보반환 홍보에는 이들의 이름과 노력은 거론되지 않았다.
올 초 둘째 딸아이를 출산한 구 연구원은 "한미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에 태어난지 101일 된 둘째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캠페인 운동을 벌였다"며 "칭찬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동안의 노력이 평가절하 되니 서운했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2006년 결성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일본 동경대로부터 같은해 조선왕조실록 47책을 돌려받는데 기여했고 2011년 일본 궁내청의 조선왕실의궤 등 1205점 환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쾌거는 대개 정부만이 이뤄낸 성과로 평가, 홍보됐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스님 역시 "민간단체의 공로에 대해서 정부가 크게 평가하지 않으려하는 자세에 서운함을 느꼈다"며 "문화재반환이라는 시대사적 성취에 시민단체에 대한 정당한 평가도 있어야하는데 정부의 공로만 홍보해 기운이 빠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환수가 "문화재 환수를 위해 나선 한국 시민단체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구 연구원은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사실을 한국에서는 외면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문화재를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