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희극 소설이며, 모든 훌륭한 희극 소설이 그렇듯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므로 매우 진지한 소설이기도 하다.”
- 저자 서문 중에서
'현명한 피'는 1964년 39세의 나이로 요절한 미국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의 장편 소설이다. 오코너는 25세에 발병한 루푸스로 시한부 삶을 살면서 장편 소설 2편과 단편 소설 32편을 남겼다. 오코너는 ‘성서 지대’라고 불릴 만큼 개신교 근본주의가 맹위를 떨친 보수적인 미국 남부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그녀는 그 지역에서 보기 드문 독실한 가톨릭교도로 살면서 자신의 특수한 정체성을 작품 속에 녹여 냈고,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특유의 해학과 절제된 언어로 담아냈다.
주인공 헤이즐 모츠는 22세의 젊은 남자로, 극도로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그러나 군대에 들어가 전쟁과 부조리한 일들을 겪으면서 종교적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톨킨햄으로 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스도 없는 교회’라 이름 붙인 자기만의 교회를 세우고, ‘진리가 없다는 것이 진리’라며 길거리에서 설교를 한다. 그렇게 그는 주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구원으로부터 구원하려 하지만, 구원이 절실해질수록 더욱 믿음에서 멀어져 가고 그의 고투는 좌절되기만 한다.
조지아를 염두에 두고 오코너가 만든 가상 도시 톨킨햄은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 아니라, 사기꾼과 방랑자 등 그로테스크하고 괴상한 인간 무리로 가득한 죄의 소굴이다. 극단적 편집광이자 부적응자 에녹 에머리, 돈을 벌기 위해 맹인 행세를 하는 아사 호크스, 음탕한 소녀 사바스 호크스, 사랑 없는 섹스로 유혹하는 와츠 부인, 호객하는 가짜 목사와 거짓 선지자,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경찰관 등이 우글거린다. 그들은 음침하고 폐쇄된 공간, 낭떠러지 등의 장소에서 공포스러운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며, 거짓과 폭력을 일삼는다.
이 소설 전반에 걸친 주제는 구원과 죄악의 문제다. 그러나 소설 속에는 구원과 죄악의 문제를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그런 인물들이 엮어 내는 서사를 읽어 갈수록, 생의 엄중함 앞에서 서늘한 자화상을 마주한다. 그리고 오코너 특유의 섬세한 묘사와 담담한 문체로 전달되는 기이하고 때로 극단적이기까지 한 서사 속에서 저항의 판타지, 섬뜩한 현실 속에 스며든 은밀한 은총의 순간을 경험한다.
“우리는 인물들의 삶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수 없다. 헤이즐 모츠를 비롯해 그로테스크한 등장인물들이 우리 자신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고, 톨킨햄이라는 고딕 도시가 우리가 사는 터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책 속으로
톨킨햄에서 둘째 날 밤, 헤이즐 모츠는 번화가를 따라 상점들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마치 발판처럼 보이는 긴 은빛 광선이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고, 그 뒤로 깊숙이 펼쳐진 수천 개의 별들은 우주의 온 질서가 담긴 거대한 건축 작업이 영원에 걸쳐 완성되어 가는 것처럼 매우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하늘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톨킨햄의 상점들이 목요일에는 밤까지 영업을 하기 때문에 손님들은 쇼핑을 더 즐길 수 있었다. 헤이즈의 그림자는 그의 뒤에 있기도 앞에 있기도 했고, 때로 다른 사람들의 그림자로 인해 흐트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홀로 그의 뒤에 늘어져 있을 때는 뒷걸음질 치는 빼빼 마른 소심한 그림자일 뿐이었다.
-51쪽
공원은 도시의 심장부였다. 그는 도시에 왔고-피를 통해 깨달은 바로는-도시의 심장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매일 도시의 심장부를 보았다. 매일, 놀라고 경외감에 휩싸이고 압도당해서, 그런 것을 생각만 해도 땀이 흘렀다. 공원의 중심에는 그가 발견한 무언가가 있었다. 미스터리였다. 물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유리관 안에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타자기로 적은 카드가 있어 그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카드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는 바로 에녹 안에 있었다.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지식, 그의 안에서 큰 불안이 자라는 것 같은 끔찍한 지식이었다. 그 미스터리를 아무에게나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보여 주어야 했다. 그것을 볼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어야 했다. 이 도시 출신이 아니어야 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사람을 보면 알아볼 수 있다고 확신했고, 그를 빨리 보지 않으면 자기 안에 있는 불안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져서, 차를 훔치거나 은행을 털거나 어둑한 길목에 나와 여자를 덮칠 것임을 알았다. 아침 내내 그의 피는 오늘 분명 그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97쪽
헤이즈는 한 시간 정도 차 안에 있으면서 나쁜 경험을 했다. 죽지 않은 채로 땅에 파묻히는 악몽을 꾼 것이다.…어떤 이들은 동물원에 온 아이처럼 꽤나 경이감 어린 눈빛으로, 어떤 이들은 눈앞에 펼쳐진 것을 그저 바라보는 그런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종이 가방을 든 여자 세 명이, 그가 구매할 수 있는 생선이나 되는 듯 자세히 살펴보더니, 잠시 후 그냥 지나갔다. 캔버스 모자를 쓴 남자가 안을 쳐다보며 엄지손가락을 코에 갖다 대고 다른 손가락들을 흔들었다. 그다음 어떤 여자가 양쪽에 두 어린 사내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다가 안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잠시 후, 그녀가 아이들을 밀쳐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안으로 들어와 잠시 그의 곁에 있어 주겠다는 의사를 보였지만, 유리가 막혀 들어올 수 없자 결국 가 버렸다. 그러는 동안 헤이즈는 차 밖으로 나가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고 이리저리 막혀 꼼짝도 못했다. 호크스가 렌치를 들고 타원형 창문에 나타나 주길 계속 기대했지만 결국 그 맹인은 오지 않았다.
-183쪽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 허명수 옮김 | IVP | 268쪽 |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