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연휴였던 지난 1월 28일,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열차 승무를 마친 여승무원 A씨는 휴식시간을 이용해 부산역 인근의 코레일 여직원 숙소를 찾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마주했다.
승무원 고용을 맡은 코레일 자회사인 코레일관광개발의 B모 부산지사장이 '금남(禁男)의 구역'인 여직원 숙소 안까지 들어와 숙소와 화장실 쓰레기통의 내용물을 봉투에 옮겨 담고 있던 것.
A씨는 "여자 화장실 휴지통에는 생리대나 피 묻은 화장지, 스타킹 등 여자들이 감추고 싶은 각종 '비밀'이 있지 않느냐"며 "남성 상사인 B 지사장이 그것을 직접 옮기는 광경을 본 순간 소름이 끼치고 성적 수치심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B 지사장은 연휴 동안 환경미화 담당자가 쉬느라 숙소가 더러워질까 걱정돼 손수 청소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더구나 당시 또 다른 여승무원과 함께 청소해 문제가 될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B 지사장은 CBS와의 통화에서 "회사와 상의하기 전에는 구체적인 입장을 밝힐 수 없다"면서도 "선의로 자기들(여승무원)을 위해 했던 행위가 그렇게 비춰질 수 있다니 당황스럽고 답답할 따름"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A씨는 "연휴는 물론 주말에도 환경미화 직원이 없으면 숙소를 이용한 여승무원이 청소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반박한 뒤 "애초 여승무원들이 잠을 자거나 옷을 갈아입는 숙소에 남성 간부가 무단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여승무원 C씨는 "그동안 B 지사장이 여직원 숙소에 종종 드나들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인사권을 가진 고위 간부에게 아무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며 "B 지사장에게 불려가 함께 있었다는 여승무원도 남성 상사와 여성 용품을 청소하느라 무척 수치스러웠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B 지사장은 앞서 2014년 CBS 단독 보도(대량해고 시련 KTX 여승무원, 이젠 사내 성희롱으로 고통)로 각종 성희롱 의혹이 제기된 바 있어 여승무원들의 충격이 더욱 크다.
당시 B 지사장이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성폭력적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10여명의 여승무원으로부터 제기되고, 관련 증거까지 발견됐다.
하지만 사측은 15일 기한 안에 피해자가 증거를 제출하지 않아 처벌할 수 없다며 진상 조사를 종결 처리했다.
이에 대해 노조는 "사측 조사 담당자가 'B지사장에게 성희롱 인정 여부와 조사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며 협박했다"고 주장하면서 사측이 '봐주기 감사'를 벌였다고 반발해왔다.
이번 사건의 경우 A씨가 문제 제기에 나서면서 지난 3월 사내 성희롱 고충처리위원회가 열렸다.
고충처리위는 "A씨가 성적 수치심을 느낄만한 소지가 있다"며 "향후 유사사례 재발방지를 위해 B지사장에 대한 관리자 교육 등을 대표이사에 권고한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정작 B 지사장의 행위에 대해서는 "숙소 관리책임자로 숙소의 청결을 유지하고자 하는 일적인 측면이 크다"며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의결했다.
여성 하급자인 피해자는 성적 수치심을 받았지만, 가해자인 남성 상사는 성희롱을 하지 않았다는 모순된 결론을 내린 셈이다.
이에 대해 철도노조는 "5명의 고충처리위원 중 외부 전문가를 포함해 3명이 성희롱으로 판단했다"며 "돌연 고충처리위원장이 규정을 어기고 표결에 참여한 뒤, 찬반 동수인 경우 본인이 의결권을 갖는다면서 일방적으로 '성희롱 아님' 의결을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B 지사장은 코레일관광개발 사장과 마찬가지로 철도업계에 막강한 인맥을 형성한 철도고 출신에 철도공사 퇴직자"라며 이른바 '철피아'가 성희롱을 거듭 은폐한 구조적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실제로 자체 설문조사 결과 여성승무원의 1/3이 직장 내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지만, 78.2%는 "사측이 성희롱을 은폐하거나 방관한다"고 답할 만큼 성희롱 은폐와 가해자 비호가 심각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철도노조는 16일 기자회견을 열어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서울역 앞에서 무기한 1인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혀 사내 성희롱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