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함께한 이들은 하늬·높새·갈마·소슬바람처럼 다양한 색(色)을 지닌 네 명의 중년 여성이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시선을 따라가는 이야기처럼, 여행 중 매순간 벌어지는 상황들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 책 속으로
마스꼽스끼 바그잘
모스크바에서 4시간을 달려와 내린 곳은 모스크바 역.
실제 기차역 이름이 마스꼽스끼 바그잘(모스크바 역)이다.
무슨 소리냐고?
나도 엄청 헷갈렸다. 우리와 다른 사고방식이 낳은 체제를 이해하기 전에는.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이 없다. 다시 말하면 쌍뜨뻬쩨르부르그에는 쌍뜨뻬쩨르부르그 역이 없다는 말씀. 러시아 기차역 이름은 도착지 지명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스크바에서 쌍뜨로 가려면 쌍뜨 역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 물론 반대로 쌍뜨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타려면 모스크바 역으로 가야 한다.
설명이 좀 더 필요하겠다.
사실, 우리가 타고 온 삽산은 레닌그라드스끼 바그잘(레닌그라드 역)에서 출발했다. '쌍뜨뻬쩨르부르그'가 옛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로 불렸기 때문. 그래서 기차역 이름은 아직도 옛 지명을 쓰고 있다. 그러니 모스크바에서 쌍뜨로 오려면 레닌드라드스끼 바그잘(레닌그라드 역)을 찾아야 한다.
처음엔 정말 이상했지만 한 번 타보니 기발한 발상과 합리적인 사고의 걸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크고 복잡한 기차역에서 기차를 잘못 타는 일은 꽤 흔히 일어나는 실수 아닌가. 그리고 기차역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난감한 실수도 기차를 잘못 타는 경우이다. 하지만 러시아식이라면 이런 문제가 애당초 근절이다. 일단 역을 바로 찾아가기만 하면 다른 곳으로 가는 기차를 탈 염려는 없으니까. 그리고 목적지 지명을 모르고 가는 경우는 없을 것이니 역을 잘못 찾아가는 실수를 할 확률은 아주 낮을 것 아닌가 말이다.
역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아니 죽을 때까지 유연해야 한다. 단단하게 굳어지는 사고의 껍질을 늘 경계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벽으로 주변을 단단하게 둘러싸는 고지식은 노인이 걸리기 가장 쉬운 질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이미 질병의 언저리에 발을 디밀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남몰래 놀란다. 그렇지 않다면 '남몰래 놀라기'가 아니라 그것조차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열려있는 유연함'을 실천해야 하지 않는지. 하지만 나는 곧바로 실천하지 않고 생각만 하고 있다. 이것도 오래된 나의 버릇이다. 생각이 바로 말로 나가지 않는 것.
나이가 들수록 습관은 점점 고착화된다는데.
생각은 꼬리를 물고 기차는 쉬지 않고 달린다.
차창에 스마트폰을 들이대고 러시아 들판을 몇 장 찍는다.
지나가는 풍경은 왜 쓸쓸한지 모르겠다.
- 본문 '넷째 날' 중에서
조정희 지음 | 조정희 사진 | BG북갤러리 | 334쪽 | 1만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