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웅은 고전을 고전 ‘그대로’ 전하지 않는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려고, 자기만의 생각을 넣고 과감히 고쳐 쓴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나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서도 그랬지만, 각색의 귀재라는 그의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창극 ‘흥보씨’ 내용을 보면 원작의 흥보가 기가 막힐 정도이다. 과감해도 이리 과감히 고쳐도 되려나 싶다.
연생원의 부인은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건달과 바람을 피워 득남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를 못 갖던 연생원은 '놀'랍다고 해서 놀보라 짓는다. 흥보가 한 살 위 형이고, 놀보가 동생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자권을 넘긴 흥보는 엄동설한에 길바닥으로 쫓겨난다. 거기서 생면부지에 거지들을 하나씩 구제하는데, 흥보의 심성에 감복한 거지들이 자식이 되기로 결심한다. 원작에서 다산 왕이었던 흥보를, 각색에서는 입양 왕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비틀 대로 비틀어버린 흥보 이야기는 재미가 있다. 황당한 점은 있지만 고선웅의 생각에 공감이 되기도 한다.
착하게 살았더니 좋은 일이 생긴다가 아니라, 착함이 체화돼 삶의 깨달을음 얻는 것이 핵심이다. 고 연출은 “선행은 베푸는 게 핵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며 "선행 자체가 내게 복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이 고선웅 식 ‘권선징악’이고,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도식을 과감히 비트는 이유는 지금 시대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고선웅의 말대로 라면, 나쁜 일을 하는 게 뻔히 보이는 사람인데 그는 떵떵거리며 잘 살고, 심지어 그 자식까지 금수저로 태어나 계속 나쁜 일을 하며 떵떵거린 채 살아간다. 반면 좋은 일을 한 사람은 힘겹게 사는데, 그 이유로 자식마저 흙수저가 되어 힘겹게 산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친일파와 그 후손,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이 떠올랐다. 이러니 고전의 권선징악이 현대인에게 동감이 되겠는가.
그래소 고선웅은 자기만의 권선징악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를 비틀어댄다. 원작의 흥보는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면서 박씨를 얻고, 박을 갈라 금은보화를 얻는다. 하지만 흥보씨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없다.
다만 선함을 통해 득도의 경지에 오른 흥보는 후에 형의 권한을 되찾는다. 흥보의 선한 행위가 거지들과 이웃사람들을 감복시키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선과 악의 대결은 없고, 선함 자체가 흥보를 이롭게 한 것뿐이다.
고선웅 식 권선징악이 관객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생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대적인 각색을 통해 권선징악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요즘처럼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에는 말이다. ~16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 R석 5만 원, S석 3만 5000원, A석 2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