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70여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광장의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1987년 직선제로 이뤄낸 줄 알았던 민주주의는 여전히 '미완'이었고, 독재 정권부터 행해져 온 적폐가 이제서야 청산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구속되면서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정의도 증명됐다.
그러나 여전히 '종북'과 '빨갱이'의 그림자는 대한민국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자신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이들에게 이 같은 이데올로기 프레임을 들이대며 단죄하는 것이다. 대놓고 '종북 좌파', '빨갱이'의 위험성을 역설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여기에 동조하는 또 다른 국민들도 있다.
박 전 대통령을 비호하는 보수 단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존재 자체도 불분명한 '종북' 세력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제주 4.3 사건의 기억이 더욱 필요한 이 시점에, 그 날을 되새기게 하는 작품들을 모아봤다.
◇ '순이 삼촌' : 소설부터 연극까지
1978년 발표된 작가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은 당시 금서로 지정됐다.
현기영은 제주도 출신으로, 이 작품을 통해 고향에서 일어났던 대량 학살의 참혹함과 후유증을 고발했다. 최초로 제주 4.3 사건을 문학으로 공론화하려 했던 시도였고, 이후 제주 4.3 사건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내용은 이렇다. 서울에서 지내던 '나'는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순이 삼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는 '순이 삼촌'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나가면서 제주 4.3 사건 당시 '순이 삼촌'이 겪어야 했던 비극과 살아남은 그의 삶 또한 망가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지난 2013년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연극은 소설 기본 줄거리를 충실하게 따랐다. 제주 4.3 사건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해내면서 비극적인 역사를 한 번 더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줬다.
제주 출생인 시인 허영선은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이 책을 펴냈다. 지난 2014년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4.3 사건을 기리고자 했다.
무엇보다 집단 학살의 증언,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아이들과 여성들이 당한 고통을 깊이 있게 다뤘다. 사람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4.3 사건의 전개 과정 또한 상세하게 전한다.
4.3 사건 이후, 은폐됐던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기까지의 여정도 담아냈다.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 중 여러 작품들이 책에 실려 그 아픔을 더한다.
◇ '지슬' 그리고 '비념' : 영화로 태어난 4.3 사건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는 제주 4.3 사건을 극영화한 작품이다. 영화를 만든 오멸 감독 역시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제주도민이다. 당시 그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일상'이 제주에 있기 때문에 제주의 이야기가 곧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한 바 있다.
'지슬'은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를 뜻한다. 4.3 사건 당시 피난민들이 서로 감자를 나눠 먹으며 보냈던 생존기를 그렸다. 영화 속 피난민들은 당장 죽음의 공포에 떨기 보다는, 소소한 일상과 웃음을 나눈다. 감독은 비극적 묘사보다는 4.3 사건 피난민들의 생활에 초점을 맞췄다.
제사나 다름없는 '지슬'은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 그 이면의 슬픔이 드러나도록 흑백으로 제작됐다.
임흥순 감독의 영화 '비념'은 현재와 과거를 잇는 제주의 비극을 다뤘다.
그는 제주 4.3 사건과 강정마을의 해군 기지 문제를 같은 선상에 놓고 영화를 전개해 나간다. 제주도민들에게는 두 사건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제주도 남읍리, 가시리, 강정마을, 일본 오사카 등을 돌아다니며 과거와 현재의 비극을 상징적인 장면으로 짚어낸다. 다시 돌아오면 4.3 사건으로 남편을 떠나 보낸 강상희 할머니의 잠자리 밑에는 언제나 녹슨 톱이 있다.
미술을 전공한 감독 답게 영화는 관객의 오감을 두들겨 깨운다. 평화로운 섬을 덮친 거대한 역사의 그림자는 자연의 소리들과 어우러져 기묘한 감각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