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로 칭하며 자신은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제물이 됐다'고 주장했다.
12.12사태는 '사적인 권력추구'가 아닌 '시대의 요청'으로, 6.29선언은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 아닌 '1980년대에 우리가 이룬 정치적, 경제적 성취의 총화'라고 재정의 했다.
◇ "광주사태 때 양민살상‧발포명령 없었지만 제물 되고 십자가 져"
2일 CBS노컷뉴스가 입수한 회고록 서문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금까지 나에게 가해져온 모든 악담과 증오와 저주의 목소리는 주로 광주사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이어 "상처와 분노가 남아 있는 한, 그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 없을 수 없다고 하겠다"며 "광주사태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원죄가 됨으로써 그 십자가는 내가 지게 되었다"며 자신을 '제물', '십자가를 진 사람'으로 비유했다.
이어 "광주사태로 인한 직간접적인 피해와 희생이 컸던 만큼 그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며 "나를 비난하고 모욕주고 저주함으로써 상처와 분노가 사그라진다면 나로서도 감내하는 것이 미덕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나의 유죄를 전제로 만들어진 5·18 특별법과 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에서조차도 광주사태 때 계엄군의 투입과 현지에서의 작전지휘에 내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집요한 추궁이 전개됐지만 모두 실패했다"며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발포명령'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지난 1997년 4월 '12·12, 5·18 사건' 확정판결에서 '광주 재진입 작전명령은 시위대의 무장상태 그리고 그 작전의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시위대에 대한 사격을 전제하지 아니하고는 수행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그 실시명령에는 그 작전의 범위 내에서는 사람을 살해하여도 좋다는 발포명령이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며 전 전 대통령 등 피고인의 내란목적 살인혐의를 인정한 바 있다.
◇ "12‧12사태, 시대의 요청…대통령된 뒤 머슴처럼 일해"
자신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인 12‧12사태에 대해서는 "시대의 요청 이었다"고 재차 주장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어떤 이들에게는 아직도, 12‧12와 5‧17이 내 사적인 권력 추구의 출발점이라고 단정되고 있겠지만, 나를 역사의 전면에 끌어낸 것은 시대적 상황 이었다"며 "혼란과 갈등의 소용돌이는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비상한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비상한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10‧26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뒤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시대적 요청'으로 헌신과 희생하는 심정으로 12‧12사태를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전 전 대통령은 "나의 대통령 취임은 상황의 산물이고 시대의 요청이었다"며 "나 개인으로 보면 사적인 권력 의지의 성취가 아닌 운명적 선택이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된 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부으며 머슴처럼 일했다"며 "5공화국을 '권위주의 통치시대'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은 '머슴처럼'이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지만 나는 다수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인 시간에 여유가 없다고 보았고, 따라서 강력한 통치력의 발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 "6‧29선언, 국민에 대한 항복 아냐…'우리가' 이룬 정치적‧경제적 성취"
1987년 4월,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한 뒤 전국 18개 도시에서 학생과 시민 1백만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을 수용했던 6.29선언에 대해서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우리가 이룬 정치적, 경제적 성취의 총화"라고 주장했다.
그는 "6.29선언을 놓고 5공화국 정권의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라고 하는 데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6.29선언은 단지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수용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1980년대에 우리가 이룬 정치
적, 경제적 성취의 총화였다"고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이어 "그때 내가 국민과 싸우다가 패배해서 항복한 것이라면, 나는 대통령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고 그 즉시 물러나야 했지만 6.29선언 직후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다"며 "나는 그로부터 8개월을 더 재임하면서 6.29선언에서 밝힌 민주화 조치들을 모두 완수하고 1988년 2월 25일 임기를 마친 후 청와대를 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5공화국의 경제적 성공이 민주화의 요구를 불러왔다는 것은 역설이 이 아니라 순리인 것"이라며 자평했다.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5.16혁명의 횃불을 들었던 당시의 설계도에는 장기집권이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며 "나는 박 대통령이 18년 넘게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권력의 마성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혁명의 그 순결한 목표를 완수해놓고 물러가겠다는 사명의식,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믿고있다"며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을 강행하고, 연임 제한 규정을 없앤 유신헌법을 만들어 나간 그 수순의 어느 시점에 아름다운퇴장을 생각하는 고뇌가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반대한 민주화운동인 '부마항쟁'에 대해서도 "부마사태 등 우리 내부의 혼란 상황을 틈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가장 걱정스러웠다"며 당시를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