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샤 하이페츠, 블라디미르 소콜로프, 라벨, 비트겐슈타인, 바흐, 베토벤, 브람스, 안나 네트렙코, 푸치니, 베르디, 리히테르, 모차르트, 므라빈스키, 스트라빈스키, 비틀스, 조성진과 임동혁, 그리고 김선욱까지…. 저자가 들려주는 시공간을 초월한 여러 음악가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통해, 좋아서 즐겨 듣는 클래식, 삶을 쉬어가게 하는 클래식, 예술가들의 영감과 인사이트를 엿볼 수 있는 클래식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책 속으로
전쟁의 경험과 기억이 라벨에게 어떤 영향을 얼마나 끼쳤는지를 가늠하긴 힘들지만, 그 이전의 작품들과 이후의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확실하게 달라진 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 이런 느낌은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콘트라베이스에 실린 콘트라바순의 소리는 마치 심해를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고래의 울음처럼 끝없이 가라앉아 너무나 깊고 어두운가 하면,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과 조각난 기억과 감정이 여기저기 흩어져 아스라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피아노의 카덴차가 나타나 흐느끼다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라벨은, 또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전쟁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삶의 고통을 견디고 이겨냈습니다. “가장 어렵고도 본질적인 것은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고난 중에도 삶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모든 것이며 또한 신이기 때문이며, 삶을 사랑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그래서 단테는 《신곡》에서 살아서 지옥을 건넌 자만이 죽어서 천국에 들 수 있다고 했던 겁니다. -p.33-34 <삶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피아노 협주곡 >에서
안나 네트렙코의 존재가 지금처럼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알려진 것은 2000년대 초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도밍고가 발굴한 테너 롤란드 비야존과 몇 차례 호흡을 맞추면서부터입니다.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청순하지만 적극적인 성격의 시골처녀 아디나를 완벽하게 소화했고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서는 무채색의 무대를 배경으로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나와 관능적이면서 가련하기까지 한 화류계 여인 비올레타의 강렬한 이미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서구의 언론들은 하나같이 팔방미인 소프라노의 출현을 반기면서 호들갑을 떨었고 “마린스키 극장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한 소녀가 우연히 마에스트로 게르기예프의 눈에 띄어 일약 스타가 되었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사실이고 게르기예프에게 발탁되어 오페라 무대에 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청소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자주 또 가까이서 오페라를 만드는 현장을 보고 싶은 열망에서 택한 일이었고, 게르기예프와 처음 호흡을 맞춘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역은 1993년 글린카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듬해의 일이었습니다. -p.43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나’로 존재할>에서
홍승찬 지음 | 별글 | 180쪽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