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삶과 죽음을 정면으로 다룬 팩션

윤태영 장편소설, '오래된 생각'

노무현의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 '오래된 생각'. '대통령의 복심', '노무현의 필사' 등 권력의 핵심으로 불렸던 윤태영 청와대 전 대변인이 8년여 간 고통스럽게 간직한 노무현의 이야기를 소설을 통해 세상에 꺼내놓았다. 독자들이 사실과 허구 사이를 끊임없이 가늠하게 함으로써 진실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며 팩션의 형태를 고수하였다.

1987년 부산 민주화운동부터 2003년 기적같은 비주류의 당선, 정치적 음모와 갈등, 끝없는 고뇌, 그리고 2009년 마지막 선택까지 부산과 신촌, 종로를 잇는 사람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지만 치밀하게 그려냈다. 질곡과 환희의 대서사를 그린 이 책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을 읽고 추억할 수 있으며, 절망과 허무를 함께한 동시대인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다가올 변화와 혁신의 전주곡이 되어줄 것이다. 더불어 권력과 시민 그리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고찰하는 값진 시간을 선사한다.

책 속으로

“세금 올린 정권은 다 망했습니다.” 그렇게 말해놓고도 아쉬움이 남는 듯, 그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우리뿐만 아니고 우리 국민들도 나라 살림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말도 안 하고 넘어가는 게 가능할지…. 항상 역풍을 맞을까 고심하기도 하지요.”
이 대목에서 대통령은 말을 잠시 멈추고는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결국은 자기 삶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약간의 불일치가 생깁니다. 참모들은 제 인생을 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좋은 정치만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결국 한 인간으로서 삶의 선택에 치열하게 맞닥뜨리는 것은 아닌 셈이지요.” 증세 이야기가 어느 사이엔가 삶의 선택에 대한 대통령과 참모의 입장 차이로 옮겨가 있었다. 대통령은 참모들의 시각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언제나 사생관이 뚜렷한 대통령이었다. 어느 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초선 국회의원 시절, 기득권 노조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현장을 조사하던 때였다. 각종 루트를 통해 그에게 많은 협박이 전달되었다. 그중에는 실제로 살해하겠다는 협박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산다. 협박은 전혀 두렵지 않다.”
진익훈의 머릿속에서 그 말이 다시금 오버랩되었다. 분명한 것은 대통령 스스로가 큰 벽을 마주하고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이었다. 그 벽을 어떻게 넘으려는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172~175쪽

“이제까지 봐온 것 중에 오늘이 제일 강경하군요.”
미국의 입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의 안보도 중요하지만 한반도의 평화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어떤 형태든 한반도 긴장을 높이는 방향의 제재 조치에는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인이지만, 막상 전장에서 죽는 것은 군인이다. ”
그가 평소 자주 하는 말이었다. 혹여 미국과 북한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 군사적 충돌이라도 생기면 한반도의 남쪽은 전쟁의 참화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접견이 계속되는 동안 대통령의 얼굴은 몇 번이나 벌겋게 상기되었다. 때로는 격앙된 표정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긴 설득이 이어졌다. 접견을 마치고 관저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그는 진익훈 대변인에게 기록해두라며 말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고집 센 나라와 가장 힘센 나라 사이에 끼어 있다. ”-181쪽

뒷목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대통령은 구체적인 말을 삼가고 있었을 뿐, 임기를 단축하겠다는 기존의 생각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가 심각했다. 진익훈은 1부속실장에게 지시처리를 요청한 후 서둘러 비서실장실에 전화를 걸었다. 문건을 확인한 비서실장은 지체 없이 핵심 수석과 비서관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혹여 이야기가 외부로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해 참석자는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비서실장실에서 삼십여 분 동안 토론이 이어졌다. 사실 토론이라 할 것도 없었다. 결론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대통령이 사임 의사를 접을 것이냐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이야기된 내용을 가지고 비서실장과 몇몇 수석이 관저로 향했다. 진익훈도 뒤따라 올라갔다. 대통령이 웃으며 일행을 맞았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얼추 다 했습니다.”
낭패한 표정의 비서실장이 뜻을 접어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대통령은 시종일관 웃음을 보이며 이해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임 의사를 접겠다는 말은 없었다. 대통령이 다시 한 번 강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대통령이 사임한다 해서 대한민국 잘못될 일 없습니다. 그렇게 쉬운 나라 아닙니다.”-248~249쪽

5월 23일이었다. 숫자를 보자 갑자기 노공이산이란 필명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온 그는 내실의 컴퓨터를 켰다. 춘분도 두 달이 훌쩍 넘은 늦봄이라 새벽의 내실은 불을 켜지 않아도 사물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환했다. 그는 준비된 말들을 치기 시작했다. 다섯 시 이십일 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한글 신명조 13포인트를 선택했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몇 줄을 치고 나서 그는 잠시 멈추었다. 일단 마우스를 움직여 저장 키를 눌렀다. 다섯 시 이십육 분이었다. 첫 줄이 문서의 제목이 되었다. 그는 평소에도 첫 문장이 그 파일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첫 문장을 그대로 파일 제목으로 활용해야 내용도 파악하기 쉽고 검색도 용이하다는 것이었다. 써야 할 내용이 정리되자 그는 문장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첫 줄 앞에 한 줄을 삽입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318~319쪽

윤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336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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