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과 부인으로 일관해온 행적으로 미뤄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바이긴 하지만, 천연덕스러운 웃음 뒤에 ‘진실’ 운운하는 행태는 소름끼칠 만큼 충격적이다.
박 전 대통령은 12일 저녁 청와대를 떠나 서울 삼성동 옛집으로 향했다. 헌재의 파면 선고에도 청와대에서 버틴 지 사흘째, 대통령 당선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한 지는 1476일 만이다.
처음엔 권좌에서 쓸쓸히 물러나는 전임 대통령에 대한 동정심도 없지 않았다. 청와대 퇴거가 계속 늦어지는 것도 인간적인 슬픔을 이해한다는 차원에서 어느 정도 용인됐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사저 귀환 일성은 모든 것을 바꿔 놨다. 그는 측근인 자유한국당 민경욱 의원이 대신 읽은 입장문에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말했다.
4개의 짧은 문장으로 이뤄진 메시지는 ‘죄송’ 등의 표현을 섞어넣긴 했지만 방점은 ‘억울함’에 찍혀있었다.
역사의 법정에선 다른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했던 측근 윤상현(자유한국당) 의원의 말처럼 헌재의 판결(결정)에 맞서 ‘진실투쟁’을 선언한 셈이다.
실제로 자유한국당 이우현 의원은 이날 박 전 대통령과 만난 뒤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억울한 게 많으신 듯하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예상 밖 강공은 ‘역사의 법정’이란 가상의 목표를 다시 설정함으로써 지지층을 재결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의 집 앞 골목에는 서청원, 최경환, 조원진, 윤상현, 이우현, 김진태, 박대출 의원 등 친박계 의원들과 지지자 수백명이 모였다.
반면, 절대 다수 국민들이 희구하는 ‘승복 선언’은 휴지조각처럼 짓이겨졌다. 헌법에 의해 탄핵된 대통령이 그 결정마저 무시하고 ‘진실’이란 미명하에 분열과 반목까지 조장하는 것이다.
끝난 줄 알았던 탄핵정국은 끝난 게 아니었고 ‘시즌 2’로 이름을 바꿔 재대결을 펼쳐야할지도 모르는 형국이 됐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적반하장식 철면피 태도는 ‘촛불 민심’을 다시 격발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심각한 궁지에 몰아넣을 공산이 크다.
이는 유력 대선주자들의 선거전략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중도 표심을 의식한 통합론보다는 적폐 청산론에 더욱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박 전 대통령의 구속수사 여부를 놓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던 기존 야권 후보들로선 입장 정리가 한결 수월해진 측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검찰 입장에서도 박 전 대통령이 먼저 ‘진실’을 운위하며 국민감정에 불을 지르고 나선 이상 더 머뭇거릴 이유가 사라졌다.
박 전 대통령으로선 헌재의 기각‧각하 가능성만을 철석같이 믿고있다가 그야말로 패가망신한 것도 모자라 똑같은 실책을 불과 며칠 만에 되풀이하는 셈이다.